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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윤동주 유고 시집_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부

by noksan2023 2024.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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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 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어 보세」

몇 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흐르는 거리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통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追憶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 교외郊外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신 시詩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學 봉투를 받어

 

대학 노一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높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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