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갈 데 소 간다
'말'과 '소'는 엄연히 다른 짐승이다. 그리고 그 용도(用途)도 다르다.
'말'은 주로 사람이 타는 데 쓰이지만, '소'는 일을 하는데 쓰인다.
그래서 '말'이 갈 데가 따로 있고, '소'가 갈 데가 따로 있다.
만약 말이 갈 데를 소가 간다거나 소가 갈 데를 말이 간다거나 하면 안 갈 데를 간 것과 같다.
그리하여
"말 갈 데 소 간다."라는 속담은 '안 갈 데를 간다'는 의미를 띤다.
한편
"말 갈 데 소 간다"
를 '말이 가는 데는 소도 갈 수 있다'로 해석하면, '남이 할 수 있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말은 주로 사람이 타는 데 쓰인다면, 소는 주로 일을 하는 데 쓰인다. 서로 용도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말이 갈 데가 따로 있고, 소가 갈 데가 따로 있다.
만약 말이 갈 데를 소가 간다거나, 소가 갈 데를 말이 간다거나 하면, 안 길 데를 간 것과 같다. 그리하여
“말 갈 데 소 간다.”
는 ‘안 갈 데를 간다'라는 비유적 의미를 띤다.
“수학, 물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학생이 인문 계통의 학과를 선택한 것은 말 갈 데 소 간 격이나 마찬가지다.”
와 같이 쓸 수 있다.
그런데 이와 형식이 유사한
“말 가는 데 소도 간다.”
라는 속담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말이 능히 갈수 있는 데라면 느리기는 하더라도 소 또한 갈수 있다는 것으로, ‘남이 하는 일이면 저도 노력만 하면 능히 할수 있다'는 의미다.
말
말은 가축의 하나이며 학명은 Equus caballus L.이다. 말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의 화석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신생대 제3기층 초기의 지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초기의 말은 체고(體高)가 25∼50㎝로서 머리와 목이 짧고 배면(背面)이 두드러지게 구부러졌으며, 4지(肢)가 매우 짧고 여우 정도의 크기로서 오늘날의 말과는 달리 앞다리에 4지(趾), 뒷다리에 3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났을 때는 미국과 유럽에 있던 말의 조상은 전멸되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오늘날의 가축화된 말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으로 추정된다. 소련의 탐험가인 프르제발스키(Przewalski)가 몽고의 중가리아(Dzungaria)사막에서 발견한 프르제발스키말이 야생말에 가장 가까운 체형을 가지고 있다. 야생말은 초원형·고원형·삼림형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초원형: 프르제발스키말이 이 형에 속하며, 대표적인 가축은 몽고말이다.
② 고원형: 타르판(Tarpan)말이 이에 속한다. 한자어로는 달단마(韃靼馬)라 하며, 우리나라의 고대 마산(馬産)과 많은 관련이 있어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1766년 그멜린(Gmelin)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19세기 후반에 멸종되었다. 이 계통에 속하는 대표적인 가축으로는 아랍말이 있다.
③ 삼림형: 빙하기가 끝나고 각 지방에 삼림이 우거진 때부터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삼림지대에 널리 퍼진 말로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무난히 자란 대형의 말이다. 북부독일에서는 이 대형마의 두골이 홍적세(洪積世: 新生代의 제일 말기인 제4기의 전반)의 유물로 출토되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산의 핀츠가우어(Pinzgauer)와 벨기에말이 이에 속한다.
말의 형태는 품종에 따라 차이가 많으나 일반적으로 목이 길고 귀는 서고, 기갑부(鬐甲部)가 높고, 등·허리가 짧으며 미근부(尾根部)가 높다. 갈기와 꼬리는 아름답게 늘어져 있다. 털의 색은 다양하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① 율모(栗毛): 밤색으로 여기에는 황금색에서부터 암갈색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② 다모(茶毛): 대체로 색이 붉은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도 농담(濃淡)의 차이가 많다.
③ 청모(靑毛): 옛말의 가라마에 해당되는 것으로 털색이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띤다.
④ 월모(月毛): 이것은 고어의 공골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피모(皮毛)가 여린 황백색을 띠고 있다.
⑤ 백모(白毛): 설모(雪毛)라고도 하는데 털빛이 순백색이다.
⑥ 위모(葦毛): 출생시에는 갈색이나 흑색이었다가 나중에 백색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한자어로는 총(驄)에 해당된다.
⑦ 박모(駁毛): 이것은 고어의 월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바탕에 흰 백반(白斑)이 있는 것을 말한다. 생장속도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 4세에 발육이 완성된다. 임신기간은 평균 335일 정도이며 생후 4, 5개월에 젖을 떼게 된다. 15세까지 번식이 가능하다.
말의 가축화는 동부유럽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서기전 3000∼2400년경으로 추정된다. 말은 그 특수한 용도로 인하여 가축화된 이래로 세계 도처에 퍼져 사육되었으며, 과학문명이 근대화되기 이전에는 전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몽고 계통의 호마와 향마라는 두 계통의 말이 존재하였다. 향마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들이 있다.
① 가모의 설: 가모(加茂儀一)는 우리나라 고대 기마인들이 스키타이식의 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부지방에서는 스키타이 기마민족으로부터 얻은 말이 일찍부터 사육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18년에 보고된 김해 패총을 비롯하여 평양 시외의 미림리유적,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의 소평동패총, 경기도 광주군 암사동(현재 서울 강동구) 및 경상북도 점촌유적 등에서 발견된 말의 치아로 우리나라에 석기시대부터 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가축화된 말인지 야생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② 하야시다의 설: 하야시다(林田重幸)는 중국의 쓰촨성·윈난성 일대에는 몽고마와는 다른 현재의 사천마의 조상인 소형마가 있었고, 이것이 구주 서남도서(제주도 포함)에 들어왔다고 추정하여 제주도의 조랑말로 대표되는 재래마의 남래설(南來說)을 주장하였다.
③ 노자와의 설: 노자와[野澤謙]는 제주마의 유전자 구성을 몽고마 계통의 중형마와 남방도서마 계통의 소형마 등과 비교 검토한 결과, 체격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중형마에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향마로 불리는 우리의 재래마는 고문헌의 기록과 형태학적 연구를 통해 볼 때, 그 체형이 소형이어서 형태학적 견지에서는 중국 남방의 소형마들과 비슷하나, 몽고마 계통으로 체형이 여러 가지 원인에서 점점 소형화된 것뿐이라고 하겠다.
고문헌에 기재된 재래마의 기록은 매우 많다. 말의 이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원봉2년……우거청강태자헌마운운(元封二年……右渠請降太子獻馬云云)”이라는 내용으로 말을 사육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밖에 군용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과 신라에서는 거(阹)라는 말 목장의 수도 많았고, 목숙(苜蓿)을 대륙에서 들여와서 말의 사료작물로 재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서는 일본에 말을 보낸 사실도 있다. 다른 문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중형마는 북방 계통으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설이 인정되고 있다. 문헌적으로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왕견 아직기양마이필즉양지어경판상구인이아직기영장사(百濟王遣阿直岐良馬二匹卽養之於輕坂上廄因以阿直岐令掌飼)”라 하였고, 『고사기(古事記)』에서는 “백제국조고왕이목마일필비마일필부아직길사역공상(百濟國照古王以牧馬壹疋比馬壹疋付阿直吉師亦貢上)”이라 하여 백제에서는 아직기(阿直岐)로 하여금 일본에 말 두 필을 보내고 또 이의 사육을 맡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때 일본에 좋은 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육방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는 이색(李穡)이 “아동방마유이종왈호마북방래자야왈향마국중소출야국마여로무족이양마(我東方馬有二種曰胡馬北方來者也曰鄕馬國中所出也國馬如驢無足以良馬)”라 하여 국내에 두 종류의 말이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설화
말과 관련된 설화로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전해진다. 서기전 69년 경주의 알천에서 6촌의 장들이 모여 군주의 선출을 의논하고 있을 때 남쪽 양산 밑의 나정에 백마가 무릎을 꿇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자리에는 큰 알 하나가 있었고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박혁거세라는 것이다. 이 밖에 고구려의 명마 거루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대무신왕 때 부여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골구천이라는 곳에서 거루라는 신마를 잃어버렸다. 일년이 지난 뒤 그 말이 부여마 100여 필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민속
우리 민속에 혼인을 정할 때 궁합을 보는 일이 많다. 이때 말띠의 여자, 특히 경오년(庚午年)에 태어난 여자는 백말띠라 하여 기가 세서 팔자가 사납다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오(午)는 화성(火性)이어서 성질이 급한데서 나온 속설이다. 이와 같이 말이 강한 양성(陽性)이라는 데서 액귀나 병마를 쫓는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소
소는 소과 우속에 속하는 동물이다. 인류 역사의 기록에서는 의식을 거행할 때의 희생물로 소가 처음 등장하며, 이후에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역용(役用) 소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나라 고유 품종인 한우도 역용종으로서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통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을 보전하기 위해 국가에서 소의 도살을 금지하기도 했고 농가에서는 생구(生口)라 하여 식구의 일원으로 소중하게 다루었다. 농기계가 역용 소들의 역할을 대신 하면서 현재는 식용 육우와 우유생산용 젖소 두 종류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학명은 Bos taurus이다. 소의 명칭은 우리말로는 수소 · 암소 · 송아지 등으로 불리지만 한자어로는 더욱 복잡하고 상세하다. 즉 수소를 특(特), 암소를 고(牯)라고 하며 송아지도 갓난 것은 독(犢), 두 살짜리는 시(㸬), 세 살짜리는 삼(犙), 네살짜리는 사(○)라 한다. 또 한 가지 색으로 된 것은 전(牷)이라 한다.
[형태]
소의 형태는 그 종류나 품종에 따라, 또는 같은 품종이라 할지라도 지역, 개량도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어 일괄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사육되어 오면서 독특한 형태적 발달을 한 전형적인 역용우(役用牛)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머리는 몸체에 비하여 작고 짧으며 이마는 넓고 콧대는 길고 뺨은 풍부하게 발달되어 있다. 눈의 동작은 느리고 귀는 작다. 뿔은 짧고 굵은 편으로 일자형이 많은데, 암소에 있어서는 외하방(外下方) 또는 외후방(外後方)으로 구부러진 것이 많다. 목은 짧고 흉수는 적당하며 배선은 바르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엉덩이가 빈약하고 경사진 것이 결점이며, 유방은 작고 사지(四肢)는 강건하며 발톱의 질도 치밀하다. 털색은 적갈색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예전에는 흑색 또는 흑색얼룩이가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도태되었다. 무게는 수컷이 450㎏, 암컷이 350㎏ 정도이고 털은 약간 길고 거친 편이며, 피부는 치밀해서 질이 좋은 가죽원료가 되고 있다.
품종
소에는 형태 · 생리적 특성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품종이 있다. 용도에 따라서는 우유를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유용종, 고기를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육용종, 노동력의 이용을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역용종으로 구분한다. 대체로 그 이용가치 전체를 100으로 할 때 위의 세 가지 중 어떤 한 가지 목적에 이용되는 비율이 70∼80이상을 차지할 때에는 이용되는 용도의 명칭을 붙이고, 두 가지 또는 세 가지의 용도가 서로 겹쳐서 그 비율이 비슷할 때에는 겸용종이라 한다.
유용종에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육되고 있는 네덜란드 원산의 홀스타인(Holstein)을 비롯하여, 영국 원산의 건지(Guernsey) · 저지(Jersey) · 에어셔(Ayrshire) 등이 있으며, 육용종으로 유명한 것은 역시 영국 원산의 쇼트혼(Shorthorn) · 해리포드(Hereford) · 애버딘앵거스(Aberdeen Angus)와 프랑스 원산의 샤로레(Charoray), 열대지방 원산의 브라만(Brahman)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해리포드 · 샤로레 등의 품종은 최근 우리나라 재래우의 육용능력 향상을 위한 개량에 많이 이용되고, 브라만은 일찍이 제2공화국 때 제주도 송당목장에 도입되어 사육된 일이 있으며, 쇼트혼 등도 일제시대 한우개량에 이용이 시도된 일이 있다. 한편, 한우와 중국의 황우(黃牛) 등은 대표적인 역용이었으나 한우는 최근 육용으로 개량이 진행되고 있고, 일본의 화우(和牛)는 과거 역용종이 육용종으로 이미 개량된 것이다.
[생태]
소는 발육상태에 따라서 조숙종(早熟種) · 중숙종(中熟種) · 만숙종(晩熟種) 등으로 나누어져 체격과 생태에 차이가 있다. 소는 대체로 조숙종은 생후 14∼18개월, 만숙종은 18∼24개월이면 번식에 이용할 수 있다. 약 280∼285일간의 임신기간을 경과하여 출산하면 포유기간 3∼5개월을 거친 뒤 사료를 먹기 시작한다. 소의 치아는 문치(門齒) · 우치(隅齒) · 전구치(前臼齒)는 유치(乳齒)로 나타났다가 나중에 영구치가 나오고, 후구치(後臼齒)는 처음부터 영구치로 나타난다. 유치의 교환도 소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중숙종에서는 만 4세까지 유치의 교환상태로 연령을 정확히 감정할 수 있다. 후구치가 완전히 다 나는 시기는 중숙종의 경우 26개월 후가 된다.
건강한 소의 호흡 수는 환경과 몸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수소는 1분에 20∼30회 정도이며, 맥박은 수소 40∼56회, 암소 70∼90회이고, 체온은 평균 38.5℃이다. 체질은 유용종 또는 육용종에 많은 정미한 체질, 외견상 활발하여 보이고 식욕이 왕성한 강장한 체질, 골격이 발달하고 사지가 커서 주로 역용으로 이용되는 조야한 체질이 있다. 성질은 일반적으로 온순한 편이지만 품종과 개체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① 신경질: 동작이 경쾌하고 약간의 자극에도 흥분해서 다루기가 곤란하며 정미한 체질에 많다.
② 다혈질: 아주 온순한 것으로 역용종에 많다.
③ 임파질: 온순의 도를 넘어서 신경작용이 둔하며 육용종에 많다.
[한우의 특성]
한우는 세계에서 유일한 우리나라 고유의 역용종으로, 수천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품종이다. 성질은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면서도 영리하다. 털색은 적갈색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고, 체격은 북부지방의 것은 크고 남부지방의 것은 작은 편이다. 젖은 겨우 송아지를 키울 정도로 나오고 유기는 3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쇠고기를 식용으로 하던 풍습이 있어 쇠고기의 맛은 좋으나, 한우의 주목적이 농경용 · 태용(駄用) · 만용(輓用)이었으므로 그 방면으로 발달, 개량시킨 결과 고기의 생산량은 적다. 그리고 아무것이나 잘 먹고, 특히 산과(産科) 부문의 질병이 적은 특징이 있다.
[소의 기원]
고대의 문명국들은 일찍부터 소의 이용법을 알고 있었고, 또 이것 때문에 생활의 터전이 잡히고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대륙에서는 서기전 2200년, 인도에서는 서기전 25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서기전 4000∼3500년, 이집트에서는 서기전 3500년에 이미 정주적인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쟁기를 끄는 데에 소를 이용한 덕택으로 높은 문명국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1,800∼2,000년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1) 세계적 분포
1982년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보고에 의하면 전세계의 소는 약 12억 2,700만 두인데 이 중의 약 60%인 7억 2,000만 두가 이른바 선진국에서 사육되고 있고, 특히 남아메리카와 동아시아 제국에서 많이 사육하고 있다. 이것을 지역별로 다시 세분하여 보면 북아메리카 약 1억 3,000만 두, 서유럽 1억 두, 대양주 3,000만 두, 라틴아메리카 2억 8,000만 두, 아프리카 1억 3,000만 두, 극동지역 2억 7,000만 두, 근동지역 6,000만 두이며,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에 약 1억 5,000만 두의 소가 사육되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유우를 많이 사육하고 개발도상국 또는 미개발국일수록 육우 · 역우 등의 사육두수가 많다. 그리고 지세가 농경에 적합하지 않고 소를 이용할 수 없었던 지역 중 몽고 · 아프리카 내륙 · 서아시아의 일부 민족은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면서 집소를 기르지 않고 있다. 한편, 물소는 약 1억 2,000만 두를 헤아리고 있는데, 그 중 약 80%가 동아시아의 열대 또는 아열대지방에서 농경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2) 우리나라에의 도입경로
우리나라의 한우계통에 대한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① 슈테그만(Stegmann,P.)의 설: 한우를 비롯한 동아시아계통의 소는 뿔이 짧다는 것을 근거로 그 원산지를 중앙아시아로 추정하고 여기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간 것이 한우, 서쪽으로 이동하여 간 것이 고대 이집트의 단각우(短角牛)라고 하였다. 그래서 슈테그만은 동아시아계통과 이집트 단각우의 원시형태를 원우의 지방형인 보스 나마디커스(Bos namadicus)에서 찾는다.
② 오크리치의 설: 시베리아 가우는 순수한 원우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서, 만약 시베리아의 가우와 동아시아의 가우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다면 동아시아의 소도 원우종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모지즈키(望月瀧三) · 가나타니(金谷復五郎)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하다면 한우는 물론 한우와 같은 계통인 일본의 화우도 이 계통에 속한다.
③ 켈레르(Keller,C.)의 설: 중국 · 우리나라 · 일본의 재래우를 남아시아계통의 소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혹소[瘤牛]의 조상인 반텡(Banteng)계통의 소로 본다.
위와 같은 골학적인 몇 가지 설에 대하여 일본의 아베(阿部) 등은 동아시아지방의 소에 대한 혈액형 연구에서, 일본의 화우는 한우에서 나왔고 한우는 제뷰의 계통이 약간 들어 있기는 하지만 순제뷰계통인 중국의 황우와는 다르고, 오히려 만주 · 몽고에 이르는 아시아대륙 중부지역의 소와 그 혈통이 가깝다고 하였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이나 『신당서(新唐書)』 변진조(弁辰條) 등의 기록에도 부여에서는 육축(六畜)을 사육하고 이것들의 이름을 관명으로 사용할 만큼 중요시한 반면, 변한이나 진한에서는 소를 사육하기는 하였으나 부여처럼 중요시하지 않고 대부분 장송용(葬送用)으로 이용하였으므로 소의 사육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서기전 1, 2세기 때의 유적인 김해조개더미에서 소의 치아가 출토되어 우리나라에서의 소의 사육연대를 적어도 서기전 1, 2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유입경로를 확실히 밝히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
(3) 일본에의 전파
한우의 사육연대는 고고학적으로는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800∼2,000년 전의 일이다. 일본에 있어서의 소 사육은 이카다(鑄方貞亮)에 의하면 3세기에서부터 5, 6세기경이라고 하는데, 이 사실은 우리나라의 소 사육보다 약 200∼600년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육연대에 관한 고고학적 · 문헌적 자료와 더불어 전기한 소의 계통설을 종합하여 볼 때 일본의 소는 한우 계통의 소가 건너간 것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소가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것뿐만 아니라 소의 생산물의 이용, 즉 가죽다리기[鞣製] · 우유음용 등도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다. 『일본서기』의 고구려 관계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가죽다리기는 피혁공인 고구려인 스루기와 다루기가 일본에 그 기술을 전파하였고, 우유의 음용은 중국에서 이주하여 온 지총(知聰)이 우리나라 남부에서 거주하다가 내외전 · 약전 · 명당도 등을 가지고 일본에 귀화하여 가르쳐주었다. 지총의 아들인 복상(福常)도 일본으로 가서 고도쿠왕(孝德王)에게 우유를 진상한 공으로 화약사주(和藥使主)라는 성을 받았다.
소의 쓰임
[희생용]
고대에 있어서 소 사육의 가장 큰 목적은 희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유군사시역제천살우관제이점길흉제해자위흉합자위길(有軍事時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이라 하여 군사가 있을 때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그것이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이고 합쳐져 있으면 길한 징조라고 점쳤다 한다. 이와 똑같은 기록이 『진서(晉書)』 부여조에도 실려 있다. 이 사실은 소를 희생용으로뿐만 아니라 점술용으로도 이용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서기전 3세기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스키토시베리아(skytosiberia) 문화에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중국대륙에서도 같은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희생의 풍습은 북쪽의 대륙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다시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제천(祭天) 후 쇠고기와 그 밖의 산물의 사용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식용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록 제천행사 뒤에 사람이 식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용에 불과하고 주목적은 희생에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이와 같은 희생의 풍습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왔다.
궁중의 희생용 동물을 관장하던 관청은 고려 문종 때에 그 제도가 완비되어 장생서(掌牲署)라 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는 전구서(典廐署)라 하다가 세조 때에 전생서(典牲署)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농신(農神)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소를 바쳐 제사를 올렸다. 이 제단을 선농단(先農壇)이라 하였으며 해마다 풍년을 빌기 위하여 경칩 후 첫 해일(亥日)에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선농제에 즈음하여 임금에게 바친 헌시 가운데에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선농제에서는 반드시 소를 희생의 제물로 하고 이것을 탕으로 하여 많은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경]
우리나라의 남쪽지방은 지리적으로 한문화의 영향력이 약하였고 환경조건도 목축보다는 어로와 농업이 알맞아 미숙한 농업을 영위하였다. 그러다가 뒤늦게 들어온 북방의 문화와 도작(稻作)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삼국유사』 유리왕조(儒理王條)에 ‘제이사급장빙고작차승(製犁耜及藏氷庫作車乘)’이라 한 기록으로 미루어 신라 전기인 3, 4세기경에는 이미 쟁기 등의 농기구를 제작하여 논밭을 갈고 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하고 수레를 만들어 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경을 시작하였다는 기록은 그보다 훨씬 뒤인 지증왕 3년(502)으로 나타난다. 즉, 『삼국사기』에는 이때에 비로소 소로 논밭을 갈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간 인력에 의한 경작용 기구인 도끼 · 괭이 · 가래 · 낫 같은 것에 축력을 이용할 수 있는 쟁기 · 보습 같은 농기구가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농업기술상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즉, 축력에 의한 작업의 능률성과 인력의 피로감소, 심경의 가능성 등은 생산력 증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 백제에 있어서는 우경이나 우차의 이용에 관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시대에 유입된 대륙문화 속에 우경기술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1) 우차법
『삼국사기』에는 신라 눌지왕 22년(438) 백성에게 소로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우차법도 역시 문헌의 기록보다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이때부터 시작된 우차의 법이 민간에 이용됨으로써 교통 · 운반의 수단으로 경제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안악고분벽화에도 바퀴가 큰 이륜차의 가마, 마구간 같은 것, 여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과 지금의 한우처럼 코뚜레를 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경주98호고분에서도 진흙으로 만든 우차가 출토된 것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는 소의 이용이 경제적 ·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래 희생용으로 쓰던 소가 수레를 끌고 논밭을 가는 데에 쓰게 된 것은 철의 사용이 무기제조에 국한되어 있다가 농기구 제작에 이용된 것처럼 농업사상 혁명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가 농업경영의 한 요소가 됨으로써 이때까지 관련성 없이 떨어져 있던 농업과 목축의 관계가 축산이 농업 속에 포함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소에 관계된 농기구
한사군의 설치로 우리 나라의 북방 대동강 유역에 있던 토착민의 원시농업은 한나라의 발달된 철기문명을 받아들여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철제농기구 중에는 도끼 · 괭이뿐만 아니라 소에 관계되는 쟁기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고, 김해패총에서도 철제농기구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소에 관한 농기구도 기원이 오래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경(牛耕) 때문이며, 따라서 이에 필요한 쟁기와 부수품이 소에 관한 농기구의 주가 된다. 쟁기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유리왕조의 ‘제여사’라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는 쟁기를 뜻하고 사는 보습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소에 매어서 흙덩이를 부수는 데 쓰는 쇠스랑, 모심기를 하기 전에 논을 고르는 데 쓰는 써레 등이 우경에 필요한 연장들이다.
(3) 우경과 농업발달
도끼 · 괭이 · 가래 · 낫 · 꼬챙이와 같은 인력경작농구에 의존하여 오던 원시적인 농업기술에서 축력을 이용하여 쟁기로 논밭을 갈게 되는 기술로의 전환은 농업기술사상 실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인력 대신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훨씬 능률적이고 보다 넓은 면적의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심경이 가능해짐으로써 토양을 부드럽게 하고 통기를 조장하여서 토질을 개선하고 비료용량을 확대하여서 비효를 높이며 노력의 이용합리화 등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에 큰 진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역용(役用: 농사나 수레 등을 부리는 데에 씀)은 바꾸어 말하면 소의 힘을 작업에 이용하는 것인데 힘은 작업의 능력에 따라 견인력과 부중력으로 표현한다. 한우의 견인력을 체중에 대한 백분율로 표시하면 암수 평균 80% 정도인데 물소는 113%, 심멘탈 · 앵거스 등은 130%에 달한다. 그러나 한우는 온순하고 인내성이 있으며 기민성이 있어 작업능률이 높다. 또 부중력에 있어서는 체중에 비하여 큰 편으로 중국의 황우를 제외하고는 가장 세다.
작업속도는 부리는 사람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대체로 논을 갈 때의 속도는 0.5m/sec, 달구지를 끌 때와 걸어갈 때는 0.8∼1m/sec정도이다. 그리고 한우 한 마리는 하루 논 4∼5㏊, 밭 6∼8㏊를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한우를 역용으로만 사용한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경지면적에 필요한 수는 50만∼60만 두 정도가 된다. 그러나 농경의 기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역용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하된 반면, 식생활의 향상으로 인한 쇠고기의 소비는 증가하는 추세에 있어 한우를 육용형으로 개량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고, 아울러 더 많은 수의 소가 필요한 실정이다.
[육용]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선사시대 부여에 인접하여 있던 읍루족에 대한 기록 가운데, 그 풍속이 돼지를 좋아하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는 풍속이 있었다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가축을 식용하였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제천 때 소를 희생용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제사용으로 사용한 가축의 고기를 그대로 버렸을 리는 만무하므로 식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가축을 길러 그 고기를 식용으로 하고, 그 요리방법도 계속하여 여러 가지로 개발하였으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를 통하여 삼국에 퍼진 불교의 식육금단사상은 고려 말까지 긴 세월에 걸쳐 식육에 결정적인 제약을 가하고 축산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는 유교적인 계급사상과 인의 사상도 식육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1) 불교적인 살생금단과 유교적인 인(仁)의 영향
불교의 오계 중 첫째인 살생의 금단은 신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법흥왕 16년(529)과 성덕왕 4년(705) · 11년(711)에는 ‘하령금살생(下令禁殺生)’ 또는 ‘금살생(禁殺生)’이라 하여 왕명으로 도축을 금하였다. 백제에서도 법왕 때 ‘하조금살생방민가소양응전지류분어렵지구(下詔禁殺生放民家所養鷹鸇之類焚魚獵之具)’라 하여 가축의 도살은 물론 사냥용으로 쓰는 매와 새매도 기르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어로 도구까지도 불태워 살생을 금하는 범위는 물고기에까지 이르러, 일반 국민들까지도 물고기조차 입에 댈 수 없게 된 정도이었던 것이다.
고려 때에는 불교가 국교이었던 관계로 금살령은 더 엄격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정사(正史)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드물고 다만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그 편모를 엿볼 수 있다. 즉, “기정심인호불계살고비국왕상신불식양시역불선도재(其政甚仁好佛戒殺故非國王相臣不食羊豕亦不善屠宰)”라 하여, 극히 일부의 상류계급에서만 육류를 먹고 일반 백성은 불교를 좋아하여 살생을 하지 않으므로 도살하는 방법도 서툴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는 배불숭유정책으로 일반 국민에 대한 금살의 굴레는 풀어지고 오히려 식육을 권고하는 처지였지만 인의 사상은 소에서 젖을 짜는 것조차 가엽게 여겼다.
또, 소는 영농에만 사용하여도 항상 부족한 상태이었기 때문에 자주 우마의 금살령을 내렸고, 일부 상류계급에서만 먹던 우유의 금식령도 가끔 내렸다. 뿐만 아니라 식생활의 기초가 유럽의 육식문화권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미식문화권(米食文化圈)에 속하고 있어 밀을 주로 먹는 서구사람과 달리 고기를 덜 먹어도 어느 정도 건강은 유지할 수 있었다는 등의 조건과, 식용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동식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기독교문화에 따른 가축의 사육자 · 도축업자 등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반면에 불교적 살생금단이나 유교적인 천민사상의 작용도 대단히 컸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근대문명에 접함에 따라 모든 면에서 서구화하는 가운데서 경제력의 향상으로 인한 육식 경향은 상승일로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 한구석에 유교적인 실업기술천시의 의식이 잠재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월에 따라 많이 진보되고 축산도 발달해서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의 섭취비율이 영양적인 적정수준에 도달할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내다 보인다.
(2) 쇠고기요리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쇠고기를 많이 먹어온 편으로 그 요리와 이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생육용이고, 가공저장법은 외국에 비해서 비교적 뒤진 편이다.
① 쇠고기회(膾): 수육(獸肉) 가운데에서 회로 이용되는 것은 쇠고기뿐이다. 가늘게 저민 것을 회라 하고 굵게 저민 것을 헌(軒)이라 하며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다.
② 고기구이[炙]: 고기구이에는 쇠고기뿐 아니라 다른 수육도 이용되지만, 특히 우리 나라의 불고기 · 불갈비 등은 독특하고 훌륭하여 장차 세계적인 식품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③ 포(脯): 우리나라에서는 쇠고기를 비롯한 사슴고기 · 멧돼지고기 또는 말고기 등의 저장방법으로서, 이것을 말려서 포로 하는 방법이 발달하여 왔다. 고기를 얇게 썰어서 가미하지 않은 것을 포라 하고, 생강 · 육계(肉桂) 등을 가미한 것을 수(脩)라고 한다.
④ 국[羹]과 탕(湯): 국으로 이용하는 것은 주로 전육이고, 꼬리와 엉덩이뼈 등은 곰탕, 갈비는 갈비탕, 네 다리는 족탕,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섞은 설렁탕 등이 있다.
⑤ 수육[熟肉]과 편육(片肉): 쇠머리를 곤 살코기 부분을 수육이라 하고, 머리껍질과 뼈에서 나온 젤라틴(gelatin)을 굳힌 것을 편육이라 하며,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특유의 방법이다.
⑥ 장조림: 살코기를 단독으로 또는 풋고추 · 마늘 같은 것과 함께 우리나라 고유의 간장에다 넣어 조린 것으로 역시 요리법의 하나이다. 이 밖에 염통 · 콩팥 등은 불고기와 수육의 재료로, 피는 선짓국이나 순대의 원료로, 양 · 간은 회, 곱창은 국과 곱창구이 · 탕 등의 원료로, 골 · 고환 등은 삶아서 술안주 등으로 버리는 것 없이 이용되고 있다.
우유의 음용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우유문화권에서 벗어나 있지만 우유의 음용은 불교문화를 타고 일찍이 들어온 흔적이 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에 우유의 음용을 전한 것이 우리나라라는 사실이나, 『삼국유사』에 제호(醍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이를 잘 입증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문헌에는 우유음용에 관한 기록이 별로 실려 있지 않아 보다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에서는 명종 때 타락죽을 만들어 먹은 일이 있고 충렬왕 때에는 타락죽을 명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왕 11년(1385)에 왕이 사냥가는 도중에 우유소를 지나가다가 소가 수척한 것을 보고 선부에게 우락(牛酪)을 바치지 말라고 명하였다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왕실 또는 상류계급에서는 우유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제도는 계승되었다.
그러면 수(酥) · 낙(酪) 또는 타락죽이란 어떤 것인가? 중국의 농서인 『농정전서』의 설명을 보면 3, 4월에 우유를 짜서 불에 조려서 냉각한 뒤에 유피를 걷어내어 수를 만들고, 그 나머지에 기성락(旣成酪)을 첨가하여 체온 정도의 온도로 발효시켜 응고시키면 낙이 된다고 하였다. 즉, 수는 지금의 크림(cream)과 같은 것이고 낙은 지금의 치즈(cheese)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내의원조우유낙이진(內醫院造牛乳酪以進)’이라 하여 낙을 만들어 왕이나 기로신(耆老臣)에게 주었다고 한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이 낙으로 끓이는 타락죽의 조리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타락죽은 물에 불린 쌀을 맷돌에 갈아서 체에 받쳐 앙금을 가라앉힌 다음 그 앙금으로 잣죽 정도의 묽기로 죽을 쑤다가 반쯤 익었을 때 우유를 부어 익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우유음용이 일반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예로부터 일부나마 이것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1902년에 외국에서 개량종 젖소가 들어온 것을 효시로 하여, 일제시대에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부근에 우유목장이 경영되고 비로소 우유의 판매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요는 주로 일본인들 사이에만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유음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복 후 6 · 25전쟁을 거쳐 196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낙농업은 보잘 것 없어서 서울 근교의 얼마 되지 않는 젖소에서 생산되는 우유도 서울 시민이 소비하지 못하고 남아도는 형편이었다. 그 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낙농진흥정책과 경제발전에 힘입어 유용의 홀스타인종이 다수 도입되고, 우유와 그 가공품의 소비가 대중화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유우사육두수는 총 42만 1,746두에 이르고 있다.
[기타]
소를 도살할 때 나오는 여러 가지 부산물은 식용 이외에 공업용 · 약용 · 미술품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
(1) 뿔과 발굽
소의 뿔은 활과 같은 무기, 우산 · 칼 등의 공산품, 인재(印材)와 담배물부리 같은 세공품의 재료로 쓰이고, 발굽은 단추 · 제유(蹄油) · 비료 · 사료 등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2) 우피
우피는 다른 동물의 가죽보다 질기고, 특히 한우의 가죽은 질이 좋아서 그 용도가 대단히 넓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죽다리기가 일찍부터 발달하고, 삼국시대에는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기술을 전파할 정도였다. 용도는 다양하여 가죽신 · 가방 · 옷 · 벨트 · 지갑 등의 공산품 제조에 이용되고 있다.
(3) 뼈와 건(腱)
이러한 부산물로는 아교와 젤라틴을 만든다. 아교는 목공용 접착제 · 제지용 먹 · 인조상아 등의 원료로 쓰이고, 젤라틴은 아이스크림 · 세균배지(細菌培地) 등으로 이용된다. 뼛속에서 나오는 골유(骨油)는 비누와 초의 원료로 쓰이고, 뼈는 단추 · 젓가락 · 도장 등으로, 또는 사료용 골분, 의료용 골탄, 설탕의 정백용 등으로 쓰인다.
(4) 내장과 피
소의 내장은 식용으로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이용된다. 창자는 테니스라켓이나 악기의 줄, 수술용 봉합사의 원료로 쓰이고 위(胃)에서는 펩신 · 렌넷을, 이자에서는 인슐린 · 트립신 · 판크레아틴, 간에서는 조혈해독제 · 성장촉진호르몬, 담즙에서는 강장제와 진통제, 갑상선에서는 티록신, 부신에서는 아드레날린, 생식기에서는 호르몬제재 등을 추출한다. 피는 제과 · 약품 · 접착제 등의 원료로 쓰이고 혈분은 사료로 쓰인다.
(5) 털
소의 털은 쿠션 · 의자 · 침대 등의 충전용으로 사용하고 담요 · 띠 · 머플러 · 솔 등의 제조원료로 사용된다. 일제시대나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옷감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6) 우황
소의 담석을 말하는 것으로 담석증에 걸린 병우(病牛)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모양은 구형 또는 타원형 · 둔각삼각형이며 쪼갠 면에 황갈색 또는 적갈색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 특산약품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약으로 쓰이고 있는데, 예전에는 인삼과 함께 당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성덕왕조 · 경덕왕조 · 혜공왕조 · 경문왕조 등에는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문무왕 2년조에는 김유신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 우황 19냥을 증정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 약효는 『동의보감』에 의하면 “혼을 안정시키고 사기(邪氣)를 멀리한다. 또 간질 · 경계(驚悸) · 중풍 · 소아백병을 다스린다”고 한다. 특히, 우황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 우황청심환은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도 “납일에 내의원과 여러 영문(營門)에서 각종 환약을 만드는데 이와 같은 풍속은 공사 및 경향 할 것 없이 보급되어 있다. 이들 환제 가운데서 특효가 있는 것은 청심환과 소합환(蘇合丸)이다. 연경(燕京) 사람들은 청심환을 기사회생의 신약이라 하여 우리 사신이 연경에 들어가기만 하면 왕공 · 귀인이 서로 다투어 이것을 달라 하니 들볶이는 것이 귀찮아 처방을 가르쳐 주어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약반을 못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연경에는 우황이 없어서 타황(駝黃)을 대용하기 때문에 처방에 따라 만들어도 효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그 명성을 기록하고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이 우황청심환이 졸중풍에 인사불성하고 구안(口眼)이 와사(喎斜: 입과 눈이 한쪽으로 비틀어져 쏠리는 병)하고 수족이 불수(不隨)하는 등의 증상에 유효하다고 하였다. 우황청심환은 우황 · 인삼 · 산약(山藥: 마) · 신국(神麴) · 대두황권(大豆黃卷: 건조한 콩나물) · 금박 등 29종의 약물을 가루내어 조고(棗膏: 대추기름)와 꿀로 반죽하여 만든다.
[소에 관한 우리 민족의 관념]
소는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드는 일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며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월 들어 첫번째 맞은 축일(丑日)을 소날이라 하여, 이 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
그리고 도마질이나 방아질을 하지 않고 쇠붙이연장을 다루지도 않았다. 도마질을 하지 않는 것은 쇠고기로 요리를 할 때에는 으례 도마에 놓고 썰어야 하는데 소의 명절날이므로 이와 같은 잔인한 짓을 삼간다는 뜻이다. 방아는 연자방아를 의미하는데, 연자방아는 소가 멍에에 매고 돌리는 것이므로 자연히 소에 일을 시키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방아질을 하지 않는 것은 연자방아를 찧지 않던 풍속이 그 밖의 방아에까지 번진 것이다. 쇠붙이연장을 다루지 않는 것도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풍속이다.
한편, 우리 민속에는 기형이나 이상한 털색의 새끼가 태어나면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파사(婆娑) 이사금(尼師今)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색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늙은 소나무의 정이 청우로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우는 선인 · 도인 · 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소에 관한 일화 · 전설]
우리는 소를 한 집안의 가족처럼 여겼기에 소를 인격화한 일화가 많다. 인의 사상에 따라 소를 인격화한 이야기로는 황희(黃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황희가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느냐?” 하니 농부는 황희 옆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라고 하였다. 황희가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그것을 귓속말로 대답하느냐?”고 물으니, 농부는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 쪽이 이것을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는 것이다. 또, 김시습(金時習)이 소의 꼴 먹는 것과 불자(佛子)가 설법을 듣는 것을 비교한 것 등도 있다. 또 소의 우직하고 인내력 있고 충직한 성품을 나타내는 전설이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에는 권씨라는 농부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격투 끝에 죽은 소의 무덤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개성에는 눈먼 고아에게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켜 살린 전설이 전해지는 우답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나경의 습속]
우리나라의 관동 · 관북지방에는 예로부터 나경(裸耕)의 습속이 있었다. 나경이라 함은 정월 보름날 숫총각으로 성기(性器) 큰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목우(木牛)나 토우(土牛)라 하는 의우(義牛)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을 비는 민속이었다.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력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의 성기를 노출시킴은 풍성한 수확을 비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풍습이 관동지방에만 있고 남쪽에 없었다는 것은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의 결실이 잘 되지 않는 데서 풍년을 비는 마음이 절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소싸움]
두 소를 마주세워 싸우게 하고 이를 보며 즐기는 놀이로서, 보통 추석날에 벌인다. 싸움날 아침이 되면 소 주인은 소를 깨끗이 씻어준 뒤에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장식하며 목에 큰 방울을 달아준다. 순서에 따라 도감이 호명하면 주인이 소를 끌고 들어온다. 이때 소와 소 사이에는 포장을 쳐서 가려두어 미리 싸우지 않도록 한다. 승패는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는 소가 패하는 것으로 한다. 주로 경상남도 지방에서 성행하였으며, 강원도 · 황해도 · 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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