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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황천으로 보내다_사람을 죽이다

by noksan2023 2024.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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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으로 보내다

 

 

황천으로 보내다

 

 

 

황천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우리 아버지의 영은 황천에서 혈육이라고는 오직 하나뿐인 나에게 원수를 갚기를 기다리실 것이다.≪한용운, 흑풍≫

자연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머나먼 황천만큼이나 머나먼 곳에 있다.≪박경리, 원주 통신≫

 

 

'사망 별세 운명 영면 작고 타계 서거 붕어 승하 소천 선종 입적 열반….'

'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당사자로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5월23일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언론은 일제히 그의 죽음을 '서거(逝去)'로 전했다.

'서거'는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주로 대통령이나 그에 버금가는 공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인간의 생로병사 가운데 하나인 죽음을 나타내는 말은 이처럼 많지만 그 중 흔히 쓰이는 말은 사망 별세 타계 운명 작고 정도이다.

이들도 실은 글말에서나 자주 쓰일 뿐 우리가 실생활에서 쓰는 입말로는 대개 '죽다'나 '돌아가시다'이다.

'돌아가시다'는 '죽다'의 높임말이면서 동시에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어떤 말이 충격적이거나 어감이 좋지 않을 때 듣는 사람을 자극하지 않도록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사학적으로 완곡어법이라 한다.

우리말에는 '죽음'을 이르는 말이 많기도 하지만 특히 이 완곡어법에 해당하는 다양한 표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쓰임새를 보이는 게 '세상을 뜨다/떠나다'이다.

'뜨다'는 '자리를 뜨다' 식으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다는 뜻인데,이 말이 '세상을 뜨다'처럼 쓰이면 '죽다'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 된다.

'떠나다'도 마찬가지로 '죽다'의 또 다른 완곡어이다.

'떠나다'는 어원적으로 '뜨다+나다'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

'죽다'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어는 '가다'이다.

'억울하게 간 넋을 위로하다' '젊은 나이에 간 친구를 회상하다'처럼 쓰인다.

'눈을 감다'

'저승에 가다

''이승을 떠나다'

'불귀의 객이 되다'

'황천 가다'

'졸하다'

'몰하다'

 

따위가 모두 '죽다'를 완곡하게 이르는 표현으로,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굳은 관용구들이다.

'눈을 감다'는 '목숨이 끊어지다'를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 줄어 한 단어가 된 게 '눈감다'이다.

'저승에 가다'나 '이승을 떠나다(=이승을 하직하다)'도 '죽다'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그의 은혜는 저승에 가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병이 중해 곧 이승을 떠날 것 같다'처럼 쓰인다.

이때 '이승'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저승'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을 말한다.

어원적으로 '이승'은 '이 생(生)'이 변한 말이고 '저승'은 '저 생(生)'에서 온 말이다.

이 같은 단어 형태의 변화는 '초승달'에서도 볼 수 있다.

본래 말 '초생달(初生-)'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발음이 자연스럽게 '초승달'로 굳어져 이를 표준어로 삼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간혹 이런 과정을 모르고 여전히 '초생달'이라 말하고 적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른 말이 아니다).

'황천으로 보내다''저승으로 보내다'란 말도 관용구로 많이 쓰는데,이는 타동사 '죽이다'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황천(黃泉)은 저승과 같은 말로 서로 바꿔 써도 좋다.

또 죽은 이를 가리켜 '불귀의 객이 됐다'라고도 한다.

'불귀'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관용구로 '골로 가다''골로 보내다'란 말도 많이 쓴다.

이는 각각 '죽다''죽이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둘 다 사전에 올라 있다.

이때의 '골'은 '고택골'의 준말로 설명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와 관련해 '고택골(로) 가다''고택골로 보내다'를 관용구로 올리고,각각 '죽다''죽이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풀고 있다.

'고택골(高宅-)'은 지금의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해당하는 마을의 옛 이름으로,예부터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졸(卒)'이나 '몰(歿/沒)'은 요즘 잘 쓰이지 않지만 어떤 사람의 약력 따위를 적을 때 의례적으로 쓰는 말이다.

역시 '죽음'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로,가령 '1972년 3월14일 졸' 또는 '1915년생,1994년 몰' 식으로 쓴다.

김영봉 연세대 연구교수(한문학)는 "졸,몰의 사용은 세종실록 등에서도 확인되는데 예부터 격식을 갖춘 말로 쓰였다"며 "쓰임새가 특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고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졸'은 똑같은 말이 학교나 날짜를 나타내는 명사 뒤에서 '졸업'을 뜻하기도 하는데,'○○대학 졸/2009년 2월 졸' 식으로 거의 비슷하게 쓰이므로 '죽음'을 가리키는 경우와 구별해야 한다.

'졸'이나 '몰'은 '생년(태어난 해),졸년(어떤 사람이 죽은 해),몰년(죽은 해 또는 죽은 나이)''생졸(태어나고 죽음)'이란 단어를 만들며,동사로도 쓰여 '졸하다'라고 하면 '사람이 죽다'라는 뜻을 완곡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황천으로 보내다

 

사람이 미우면 죽여 버리고 싶은 극단적인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런 마음이 들면, 그에 따라

 

“골로 보내겠어.”

"한 방에 보내겠어.”

“황천으로보내겠어.”

 

등과 같은 과격하고 저속한 표현을 쓰게 된다.

 

‘황천(黃泉)'

 

물빛이 노란 샘'이라는 뜻으로,

죽어서 가는 곳',

곧 ‘저승'을 뜻한다.

 

‘죽여서 저승으로 보내다'가 다름 아닌 “황천으로 보내다.”다.

 

한편 “황천으로 가다.”는‘사람이 죽다'라는 뜻이다.

 

 

죽음에 대한 민속학적 이해

 

 

국립 현충원

 

 

 

죽음은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일반용어이다. 단세포에서 인간을 포함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개체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판단할 것인가는 정설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삶의 마감이자 정지이다. 살면서 겪는 수많은 경험은 인간에게 자서전적인 자아를 표상하게 하며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한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수반하는 현상으로 존재한다. 이는 주로 삶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많은 종교적 해답은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찾도록 가르쳐 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새벽, 인류는 ‘생각’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렸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대개의 학자는 죽음이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하고, “죽음의 세계란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해석에 특히 자기 식의 독단을 많이 개입시킨다. 각자 자신의 안경을 통해 죽음을 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인생에서 중대 문제이고,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말을 맞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구분에 고심한다. 생물계에는 단세포 생물도 있고 다세포 생물도 있어서, 생사를 가름하는 기준을 일정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고등 동물인 인간의 죽음을 판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심장 고동과 호흡 운동의 정지를 표준으로 삼지만 가사상태(假死狀態)인 경우도 있고, 한 때 멈추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천수를 누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저절로 여러 기능이 멈추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아직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원인이 생겨 죽음을 맞는 우연사도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壽]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을 돌려라. 그리고 미구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라.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그대가 아무리 번민할 때라도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의 소원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아아, 명성을 떨쳤던 사람도 죽고 나면 이렇게 빨리 잊혀지는 것일까!”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스(Sophokles)의 말이다. 이를 받듯이 몽테뉴(Montaigne, M.)는 그의 『수상록(隨想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한번 혼자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끝막음이다.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거부하지 못하며 전신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은 다시 되풀이된다. 우선, 종교에게 물어본다.

 

죽음에 대한 인식

 

한국인은 무척 죽음을 외면하려 든다. 그래서 말한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가난에 찌들어도 천대를 받아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좋다.

죽음은 싫다.

삶에 강렬한 애착을 지닌다.

 

죽음을 재난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다. 죽음은 휴식이 아니라 새로운 공포이고 재앙이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오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壽]’을 으뜸으로 친다. 그저 오래 살고 싶어한다.

아기를 낳았을 때 금줄을 치는 것이나, 돌을 맞았을 때 실을 안겨 주는 것이나, 모두 인생의 마디마디에 ‘오래 살아라’ 하고 기원하는 뜻을 담는 것이다.

새해를 맞아 세배를 드려도 “만수무강하십시오” 하고, 젊은이의 이러한 축수(祝壽)에 어른은 “명복(命福) 많이 받아라” 하고 덕담을 내린다. 모두 오래 살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외면하고 싶지만 가까이 있음을 안다. ‘저승 백년보다 이승 일년이 낫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저승 길이 대문 밖’인 것이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복의 마지막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은 ‘제명대로 못 살고 원통하게 죽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夭死], 객지에서 죽는 것[客死], 횡액으로 죽는 것[橫死], 원통하게 죽는 것[寃死], 분하게 죽는 것[憤死],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하늘에서 받은 수명대로 오래 살다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죽는 것[臥席終身]이 바람직하고, 억울하게 죽으면 원귀(寃鬼)가 된다. 이들은 ‘왕신’ · ‘몽달귀신’ · ‘손각시’ · ‘영산’ · ‘객귀(客鬼)’ · ‘여귀(厲鬼)’가 되어 저승에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 무속 신앙에서는 죽음이란 다름 아니라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일이다.

 

너이들을 길을 적에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금지옥엽 갓치 길러내어 생전영화 보잿든이

천명이 다 지나고 조물이 시긔하야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영별의 객이 되니

죽은 혼이라도 설고 넉시라도 설다.

<巫歌의 일부>

 

병사(病死)는 대개 천명이 다하고 조물주가 시기하여 영별의 객이 되는 것으로 알았다. 무속에서는 일반적으로 저승사자를 보내는 것은 명부(冥府)에 있는 최 판관(崔判官)이라 생각한다. 최 판관이 체포 영장인지 소환 영장인지를 발부하면 저승사자가 이것을 들고 사자(死者)를 찾아 오는 것이다. “활등같이 굽은 길을 설대같이 다다라서 닫은 대문 박차 여니 수문장이 설난하고 마당간에 들어서니 원당지신 설난하고 마루 대청 떼구르니 성주왕신 설난허구.” 저승사자는 이토록 시퍼렇게 위세를 부리며 방안으로 들어 와서는 잡아갈 사람을 무자비하게 나꿔 챈다. “실날같은 목에다가 오라사실 걸어 놓고, 한번 잡어 나우치니 맑은 정신 간 곳 없고, 두번 잡어 나우치니 열손 열발 맥이 없고, 삼세번을 나우치니 혼비백산 간 곳 없고, ……” 죽음의 장면은 이렇게 참혹하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승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혼자 가기도 하고 저승사자의 인도를 받아 가기도 한다. 어쨌든 서러운 길이다. “가다 가다가 저물거던 길에도 앉지 마오, 길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던 산에도 앉지 마오, 산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든 못가에도 앉지 마오, 용신이 아니 놓네, 또 가시다 저물거든 독에도 앉지 마오, 독신이 아니 놓네.” 명부로 가는 여행 길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고 함정도 많다. 황천강(黃泉江)을 건너면 비로소 득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는 시왕[十王, 또는 十大王]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생전의 잘잘못에 대하여 엄한 문초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염라대왕이나 최 판관의 재량에 따라서는 드물게 이승으로 환생하는 수도 있다. 민간 신앙이나 무속은 죽음에 관한 한 불교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본다. 『반야심경』에는 “낳지 않고 사그라지지 않고(不生不滅)”,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해지지 않고(不垢不淨)”, “더해지지 않고 덜해지지 않고(不增不减)”라 하였고, “드디어 늙음도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지도 않게 되는 데 이르는 것이다(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였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으며, 따라서 낳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사그라져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더럽혀진 것도 깨끗한 것도, 더해졌느니 덜해졌느니 따질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 물질적 현상이나 감각이나 표상이나 의지 · 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눈도 코도 귀도 혀도 몸뚱이도 없다. 늙음과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 처음부터 구별이 없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말한다. “중생이 낳는 것 없는 중에서 망녕되이 삶과 죽음과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를 풀이한 글은 다음과 같다. “성품에는 본래 낳음이 없으므로 삶과 죽음과 열반이 없는 것이고,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단지 오온(五蘊)이 다 공(空)이고 사대(四大)가 내가 아님을 볼 것이다. 참 마음은 모습이 없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살았을 때도 성품은 또한 살지 않았고 죽을 때도 성품은 또한 떠나가지 않는다.” 죽음은 어쩌면 이 티끌 세상을 탈출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마음가짐을 거울처럼 맑고 호수 같이 고요하게 지닐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삼세인과(三世因果)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되어 출세자유인(出世自由人)이 된다는 것이다. 서산대사에 의하면, 인간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지고 오온으로 살아간다. 사대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으로 사람의 몸은 이 네 가지에 의하여 성립이 되어 있다. 오온은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다섯 가지인데, 색은 물질로서 육체이며, 수는 감각, 상은 개념 구성, 행은 의지, 식은 의식이라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죽음에 다달아 사대 곧 육신이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온 곧 살아 움직인 활동 그것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자유인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익힌 매듭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얽매임으로 굴러다니게 된다. 『선가귀감』의 다음 구절을 보자. “사람이 죽을 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범부(凡夫)니 성인(聖人)이니 하는 감정이 끊어지지 않거나 생각을 잊지 못한다면 나귀의 태(胎)나 말의 뱃속으로 향해 의탁하게 되며, 지옥의 끓는 가마 속에 처박혔다가 전과 같이 다시 개미나 모기 등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극락과 지옥의 구분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無)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蟬脫) 훨훨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낡은 허물을 벗는 것이 죽음이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윤회(輪廻)다. 새로운 옷이 무슨 빛깔이 되고 어떤 모습이 될지는 이승의 업(業)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무가 아닌 동시에 두려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도리어 웃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이승에서 살아 움직이며 맺은 인연이 있고, 주고 받은 정이 있기에 아쉬운 느낌이 들 수는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망집(妄執)이다. 사대가 내가 아니고 오온이 다 공인 바에야 어찌 망집에 사로잡혀야 하는가! 매섭게 끊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삼세(三世)의 인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웃으며 훨훨 낡은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불가(佛家)의 인식이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 하느냐며 제자가 차근차근 공부하지 않고 덤벙대는 것을 꾸짖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말에서 공자는 죽음보다 삶을 더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시했다기보다 더 절실하게 생각했다고 고쳐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삶이 앞서 있다. 당장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질서, 곧 윤리 도덕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인(仁)을 말하여 사랑을 가르쳤고[仁愛人也], 효(孝)를 강조해 사람은 이 세상에 단독자(單獨者)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조상을 뿌리로 해 태어나는 것이며, ‘나’를 출발점으로 해 또 무수한 자손이 뻗어 나간다는 것을 가르쳤다. 알고 보면 사람은 죽음으로 하여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모습으로 영원히 이어져 간다는 것을 효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나 내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말한 바는 없지만, 삶을 알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되며, 현세의 연장이 곧 내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각별한 경의를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에 대비하고 있었다.

 

『논어』에 “공자께서는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하는 경우 배부르도록 먹는 일이 없었으며, 상가에 가서 곡을 한 날에는 종일토록 노래 부르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이 났을 때 자로가 기도 드리자고 제의하자 물었다. “그런 선례가 있느냐?” “있습니다. 뇌(誄)에 위로 천신에게 빌고 아래로는 지기(地祇)에게 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로의 대답에 공자는 말한다. “나는 기도한 지 이미 오래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왔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임종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내 발을 펴 보아라, 내 손을 펴 보아라, 『시』에 이르기를 ‘전전긍긍 조심하기를 깊은 못 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 판을 밟고 가듯 한다’ 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걱정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구나! 얘들아.” 죽음에 임해서 자기 신체의 각 부분을 점검시키고 있다. 행여 상처난 곳은 없는가, 흉터는 없는가, 잘못된 뼈마디는 없는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 몸은 부모한테서 받은 것, 한 평생 고이 지니고 있어야 효도를 다한 것이 된다. 곧, 저승에 가면 부모를 뵙게 될 것이고 그래서 새삼 되돌아 보는 것이다. 사실, 유교에서는 조상이 늘 자기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생사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증자는 임종에 또 말한다. “새가 죽어갈 적에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 사람은 마지막 죽음을 앞두면 순선(純善)한 본성으로 돌아오게 되고, 따라서 그 말도 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해지려는 것은 사람의 도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하였지만, 인간이란 하늘을 배우고 따르고 드디어는 합일(合一)하는 존재다. 천도(天道)에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聚散)과 음양(陰陽)의 성쇠(盛衰)가 있어 네 계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 맺으며 겨울에 땅속으로 사그라진다. 여름에 극성하던 양은 가을이 되면 차차 쇠하였다가 겨울에는 거의 없어진다. 그와 반면에 음이 극성을 누린다. 그렇지만 동지(冬至)날에 거의 없어졌던 양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一陽始生). 그리고는 봄이 되면 싹을 틔게 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우주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새로운 싹을 트이기 위한 사그라짐(消)이다. 천도도 인도도 사그라짐(消)과 자라남(長)의 순환인 것이다. 둥그런 보름달이 차차 사그라져 들다가 그믐이 되면 거의 없어지고 다시 초승달로 되살아나며, 이것이 돌고 도는 것(循環)과 같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제5장 12절).” 요컨대,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원죄이다. 물론, 낱낱의 인간이 자의식으로, 개별적으로 범하는 죄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공통적인 죄가 원죄이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니게 되며, 그것이 원죄인 것이다. 죽음은 이 원죄로 인해 신으로부터 받는 벌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육신의 죽음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영혼의 죽음은 생명의 원천인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육체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앞으로 간다. 이 세상의 창조자이고 구원자이고 심판자인 하느님 앞에 가서 시험대에 올라 일생 동안의 일을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말하자면 심판자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누구나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사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당했다. 신자들도 육신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을 통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

 

 

박제상 설화의 내용

 

 

 

신라 제19대 왕인 눌지왕은 어느 날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방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들을 궁중으로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술이 서너 순배 돌고 나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내 큰 아우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고, 작은 아우 미사흔(未斯欣)은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 두 나라에서 억류해 놓고 돌려보내 주지 않으니 내 비록 부귀를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다. 누구든지 두 아우를 데려와서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뵈옵게 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아뢰기를, “이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지혜와 용맹이 겸비해야 해낼 수 있습니다. 삽량주(歃良州)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면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왕은 박제상을 불러 간곡히 분부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그 길로 그는 고구려로 가서 왕과 담판을 하고 계교를 써서 복호를 신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선걸음에 다시 왜국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가 달려 갔지만, 이미 율포(栗浦) 갯가에서 배를 탄 뒤였다. 아내는 울부짖었으나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왜국에 이르자 거짓 망명해온 것처럼 가장하였다. 왜왕은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곧 믿었다. 그는 미사흔을 만나 자주 바닷가에 나가 노닐었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미사흔을 배에 태워 빨리 떠나기를 권하였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껴안고 같이 도망치기를 애원하였지만 제상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알고 뒤를 따를 것이오. 나는 여기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소.” 할 수 없이 미사흔은 혼자 도망을 쳤다. 제상은 미사흔의 방에 들어 다음 날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았다. 미사흔이 멀리 갔을 무렵에야 그는 실토했다. 왜왕은 크게 노했다. 발을 구르며 닥달하는 왜왕에게 그는 태연히 말했다. “나는 신라왕의 신하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우리 왕자를 구했을 뿐이오.”. 왜왕은 더욱 분이 치밀어 고함쳤다.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지 않았느냐?”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왜왕은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벤 위를 걷게 하였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또, 불[薪火]로 사지를 지지며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왜왕은 목도(木島)라는 섬에 귀양 보내어 온 몸을 불로 태운 뒤 목베어 죽였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다가 종내 죽고 말았다. 그 지아비는 충(忠)에 목숨을 던졌고, 그 지어미는 열(烈)에 목숨을 던졌다.

 

 

 

이차돈의 순교

 

 

 

신라 법흥왕은 불교에 독실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을 일으켜 이를 널리 펴고 여러 곳에 절도 세우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이를 가로막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는 토착신앙이 있었고, 유교가 있었고, 선도(仙道)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탄식하였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의 조화가 이지러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할 일이 없구나! 정사를 보는 여가에 부처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와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사인(舍人)이라는 하잘 것 없는 벼슬에 있는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족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나이 불과 22세인 이 젊은이가 왕의 심중을 헤아리고서 아뢰었다. “소신이 비록 비천하오나 불법을 위하여 계교를 써 보겠나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차돈도 굽히지 않았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것은 백성된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백성들이 굴복하여 감히 어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 옵니다.” “이 세상에 자비를 베풀고 아무리 하찮은 목숨이라도 고이 보전하게 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며,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거늘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왕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차돈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것은 버리기 어려우나 신명(身命)은 더욱 어렵사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찬란해질 것이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큰 뜻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로구나!” 왕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차돈은 조정으로 나가 여러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왕명이 내렸다고 거짓말을 전하였다. 놀란 신하들이 왕에게 달려가 간하였고 왕은 짐짓 크게 노하여 이차돈을 잡아 들이라 명하였다. 형구(刑具)를 벌여 놓고 왕의 추궁이 추상같았지만, 이차돈은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참형을 당하게 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옥리(獄吏)가 그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하늘이 칠흑으로 어두워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다른 기록에는 참형을 당하기 직전 이차돈이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고 전한다.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 경주 북쪽에 있는 산) 마루에 떨어졌다. 믿음을 위한 최초의 순교였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선다.

 

 

 

퇴계 이황

 

 

 

우리 나라 유학 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점한 이황(李滉)은 70생애가 바로 ‘배움의 나날’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러웠던 그는 죽는 날까지 구도(求道)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의 고종기(考終記)를 현대문으로 옮겨 본다. “경오년(庚午年, 1570) 섣달 초8일,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병석에 누우신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 찬란한 광명을 맞이하셨다. 다음 순간 선생은 옆에 모시고 있는 이를 향하여 나직이 말씀하셨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방안 윗목에 매화분이 있었고,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이 두 세 개의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다. 바깥 날씨는 쌀쌀하였지만 하늘은 맑게 개었고 바람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5시쯤이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로 모여들더니만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한 치 가량이나 쌓였다. 지붕도 마당도 앞산도 순백의 세계로 변하였다. 자리에 누워 계시던 선생께서 창문을 잠시 바라보시더니 조용한 어조로 이르셨다. ‘자리를 정돈하여라.’ 자제와 제자가 가까이 다가와 일으켜 드렸다. 선생은 꼿꼿이 앉아 자세를 가다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늘에 서렸던 구름이 흩어지고 흩날리던 눈도 개었다.” 

 

 

 

휴정

 

 

 

휴정(休靜)은 조선 불교의 높이 솟구친 묏부리이자 호국 불교를 몸소 실천한 걸승(傑僧)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왕(선조)이 의주로 파천하는 난국을 당하자 대사는 감연히 묘향산(妙香山) 깊숙한 암자에서 칼을 짚고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대사의 나이 73세였다. 선조는 팔도십륙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이라는 일컬음을 대사에게 내려주었다. 전국의 승병 대장이 된 것이다. 이후 7년 동안 대사는 남북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전전하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나이 79세였다. 뒷일은 제자인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 홀연히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갑진년(甲辰年, 1604)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 아침 일찍 일어난 대사는 목욕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창문을 열자 눈앞에 하얀 은세계가 펼쳐졌다. 간밤에 눈이 내린 것이다.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 오는 햇빛을 받으며 대사는 큰 소리로 분부를 내렸다. ‘남여(藍輿: 의자 비슷하고 위를 덮지 않은 가마)를 가져 오너라.’ 행자들이 남여를 뜰 아래 대령하자 대사는 올라타고서 눈길을 가리켰다. ‘가자!’ 두텁게 쌓인 눈을 헤치며 남여는 앞으로 나아갔다. 묘향산 주름마다 박힌 암자를 낱낱이 돌아 보았다. 그리고는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춘 뒤 불전으로 들어가 분향을 하였다. 조실로 다시 돌아와서 벼루에다 스스로 먹을 갈더니 붓끝에 듬뿍 먹물을 찍었다. 벽에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대사는 자화상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다(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다시 먹을 찍어 임종게(臨終偈)를 썼다.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벌겋게 타는 화로에 한 송이 흰 눈, 진흙 황소는 물 위로 가고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네(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쓰기를 다하자 단정히 부좌(趺坐)하고서 입적하였다. 방안에 이향(異香)이 서렸다.”

 

 

 

황현

 

 

 

황현(黃玹)은 꼿꼿한 선비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고, 가난을 즐길지언정 뜻을 굽히면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권력 있는 사람을 대하면 당당하게 정도(正道)로 타이르고, 혹 잘못이 있으면 즉석에서 면박해 마지 않았다. 시에 뛰어나고 문장에 능했으며, 고향 구례(求禮)에 들어 앉아 동서고금의 학문을 깨치느라 골몰하더니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과거를 보아 장원을 하였다. 때는 조선조 말엽, 임오군란 · 갑신정변의 뒤를 이어 청 · 일 양국이 우리 나라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조정은 극도의 문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가 문을 닫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들이 함께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그때마다 거절하였다. “그대들이 어찌 나를 귀신 나라, 미친 사람 가운데로 끌어 들여, 같은 귀신이 되게 하고 미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냐?” 그는 틈틈이 문란한 나라 사정을 춘추필법으로 기술하였다. 그 결과가 후일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정치의 부패상, 조정 상하의 탐욕상을 한 점 거리낌 없이 엄정하게 기록하였다. 1910년 8월 종내 나라는 망하고 말아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 소식이 구례 시골에도 닿았다. 그는 우선 『매천야록』을 정리하여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상자는 열지 말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 먼 훗날 햇볕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팔월 8일(양력 9월 10일) 황현은 아편을 먹고 자결을 하였다. 향년 56세였다. 네 수의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천고의 역사를 되돌아 보니,

사람으로 글자 아는 사람 되기가

이토록 어렵구나(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먼 시골에 묻혀 살던 선비에게 나라가 망한 책임이 돌아올 리 없다. 그러나 어찌 책임이 없다 하겠는가! 머리 속에 먹물이 들어 있지 않는가! 지식인은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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