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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감감소식_대답이나 소식 따위가 전혀 없다

by noksan2023 202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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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감소식

 

 

 

복수 표준어 감감소식

 

 

 

참   뜻

 

아주 멀어 아득하다는 뜻을 가진 '감감하다'에서 나온말이다. 그러므로 감감소식은 소식이 감감하다는 말이나 대답이나 소식 따위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버끔 뜻

 

그러나 일상섕활에서는 감감소식이라는 말보다는 감감 무소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감감소식이라는 말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없을 무(無)를 덧붙인 것은 소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표준어로 채택되어 쓰이고 있다.

 

 

공수처, 신임 부장검사에 ‘검사 출신’ 변호사 내정…임명은 감감소식

 

 

공수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검찰 출신인 김수환 변호사를 신임 부장검사로 내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수처는 지난달 김 변호사의 임명제청안을 대통령실에 보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한달이 넘도록 임명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 2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공수처는 지난달 10일 인사위원회 의결을 거쳐 김 변호사 임명제청안을 대통령실에 보냈다. 신규 임용할 평검사 2명에 대한 임명제청안도 같이 보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한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임명안을 재가하지 않았다. 공수처는 김 변호사 임명이 늦어지는 점을 고려해 내부 인사도 미뤘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검사 출신이다. 사법연수원 33기인 그는 2004년 전주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이후 서울동부지검을 거친 뒤 수원지검에서 부부장검사를 지냈다. 2019년 5월부터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법무법인 LKB(엘케이비앤파트너스)에서 대표변호사로 지낸 이력도 있다. 신임 부장검사와 평검사가 임명되면 수사1부에 배치될 가능성이 있다. 공수처 수사1부는 김선규 전 부장검사가 퇴직한 이후 지금까지 검사가 단 한명도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수사 인력이 부족한 상황인 만큼 신임 검사 임명이 보다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질적인 인력 부족 문제에 시달리는 공수처는 지난 23일 부장검사 3명과 평검사 4명에 대한 신규 채용 공고를 냈다. 지난 19일에는 수사관 4명을 모집한다고도 밝혔다. 소속 검사와 수사관들이 잇따라 이탈하면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큰 폭의 채용 공고를 낸 것이다. 다만 서류·면접 절차와 인사위 심의, 대통령실의 임명안 재가 절차를 고려하면 임명까지는 최소 3달 이상 걸릴 전망이다.

 

공수처는 오는 27일 임기가 종료되는 차정현 수사기획관(부장검사)과 수사4부의 이대환 부장검사, 수사3부의 송영선·최문정 검사에 대한 윤 대통령의 연임안 재가도 기다리고 있다. 공수처 내부에서는 사실상 오늘이 지나면 연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공수처는 검사 정원이 25명이지만 현재 18명뿐이다. 검사 4명의 연임이 불발되면 14명으로 줄어든다.

 

 

함흥차사

 

 

함흥차사

 

 

 

함흥차사는 조선 초기 함흥에 가 있던 태조에게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두 아들 방번(芳蕃)·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 심복을 잃은 태조는 상심하여 정사에 뜻을 잃고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이어서 1400년(정종 2) 제2차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芳遠)에게 환멸을 느낀 그는 1401년(태종 1) 고향 함흥으로 갔다. 태종은 평소 태조가 신임하던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그해 4월에 겨우 데리고 왔으나, 1402년 11월 다시 함흥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태종은 태조에게 문안하고 서울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差使)를 보냈다. 야사에서는 함흥으로 간 차사들이 태조에게 죽음을 당해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하는데, 이로 인해 한번 떠났다가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문헌에는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의 희생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순도 『태종실록』에는 그 달에 강비족속(康妃族屬)인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선무(宣撫)하다가 함주의 군중(軍中)에서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태조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다가, 그 해 12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찾아가자 서울로 돌아왔다.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는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민정중이 쓴 《노봉집》(老峯集)에 나오는 박순의 시장(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건경위

 

1.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양위한 뒤 함흥으로 갔다.

2.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다

3.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오라고 성석린을 차사로 보냈다.

4. 1401년 4월 태조가 성석린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환궁한다.

5. 1401년 11월 태조가 다시 한양을 떠난다.

6. 태종이 왕사 무학대사를 차사로 함흥에 보내고, 태조는 환궁을 약속한다. 

7. 태조가 환궁하지 않고 소요산에 머문다.

8. 1402년 1월 성석린을 다시 보내 환궁을 청하지만, 성석린은 혼자 돌아온다.

9. 1402년 조사의의 난이 발생한다.

10. 1402년 12월 태조가 환궁한다.

 

차사와 이성계의 반응

 

성석린, 무학대사가 환궁에 큰 역할을 했고, 태종 2년 11월 3일 환관 김완(金完)을 보내 문안케 하였다. 같은 달 7일에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을 보내 문안케 하고, 청원군 심종(沈淙)과 예문관 제학 유창(劉敞)을 보내 시위하게 하였다(이들 가운데 태조 이성계에게 죽은 사람은 없다). 뒤에 태조는 시위 이자분(李自芬)을 태종에게 보내 제사에 쓸 물건을 빨리 보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에게 제사에 쓸 신성한 물건을 요구할까?

 

또한 태종 2년 12월에 평양에서 머무를 때 시자에게 “내가 동북면에 있을 때에 국왕(태종)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孟州 평안남도 맹산군)에 있을 때도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으리라.”라고 말하자, 시자가 “주상께서 안평 부원군 이서와 승려 익륜과 설오를 보냈으나 중간에 길이 막혀서 돌아갔습니다”라고 변명한다. 차사를 죽이기는커녕 보내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고 있다. 

 

《태종실록》에서는 이성계가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종 1년(1401년) 4월에 환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나자, 다음해 1월 다시 성석린을 보내어 환궁을 요청한다. 이때 태조는 부처를 모시기 위해 돌아갈 수 없다고 거절하자 종친과 함께 환궁을 요청하던 성석린은 “염불하고 불경을 읽는 일이 어찌 꼭 소요산(消遙山)이라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따지자, 이에 태조가 “그대들의 뜻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라고 본심을 밝힌다.

 

두 아들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방원에게 죽은 방번과 방석을 말하고, 한 사람의 사위란 역시 방원에게 죽은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李濟)이다. 성석린은 그대로 빈손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태상왕께서 빨리 돌아오실지, 늦게 돌아오실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이후에도 성석린은 두 차례나 차사로 태조에게 갔으나 살아 돌아왔다.

 

무학대사와 함흥차사

 

태종 1년(1401) 11월 이성계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자 태종이 차사로 보낸 인물은 왕사 무학대사이다. 이에 대해서는 《태종실록》과 《오산설림》의 기록이 일치하며, 《오산설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학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알현하니 태조가

 

“그대도 나를 달래러 왔구나”

 

라고 말했다. 무학이 웃으면서,

 

“전하께서 빈도와 서로 안 지가 수십 년인데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저는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무학이 그 뒤로 함흥 본궁에 머물면서 태조와 환담하는데 태종의 단점만 말하였고, 이에 태조가 그를 믿게 되었다. 수십일 뒤에 무학이 밤중에 태조에게 청하자 태조가 환궁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자, 태종이 성석린을 그곳에 보내었다.

 

조산의의 난과 환궁

 

태조는 이후에도 한참이 지난 뒤 함경도에서 일어난 조사의의 난이 평정된 이후 한양으로 돌아온다. 당시 조사의의 난이 발생하여 조정으로부터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이 차사로 파견되어 반군을 회유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를 격파하였으나 《태종실록》 2년(1402) 11월 27일 기사를 보면 조정에서도 대규모의 정벌군이 파견되었다. 그 후 중앙에서 증원된 출정군이 관군과 합류하여 군을 재정비하고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고 함흥에 칩거하고 있던 태조를 시위하고 왔다. 《태종실록》2년(1402) 12월 8일 3번째기사를 보면 12월 8일에 태조가 한양에 환도를 하고 바로 다음날 태상왕을 시위하여 왔다고 정벌군으로 출정했던 이천우와 이빈에게 안마를, 이성도 절제사(泥城道節制使)였던 최운해에게 말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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