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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13세기 주심포 양식 건축 두문자 : 봉극 부무 수대

by noksan2023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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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주심포 양식 : 봉 극 부 무 수 대

 

정사 

락전

석사

량수전

덕사

웅전

 

 

1. 정사 락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鳳停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건축물이다. 

 

 

2. 석사 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 아미타불이 봉안된 사찰건물이다. 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한 화엄사찰이다.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에 이르는 배치 구조를 가졌다.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 공포의 구성 형식, 가구재의 구성 등에서 주심포 건물의 기본 수법을 잘 보여주며 형태미와 비례미가 뛰어나다.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에 있고 극락세계는 바닥이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불경 내용에 따라 불단을 건물 서쪽에 치우치게 배치하여 불상이 동쪽을 향하게 했고 바닥에 유약을 바른 전돌을 깔았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서 내부에 무량수불(無量壽佛: 무한한 수명을 지닌 부처)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1962년 지정)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귀경길에 부석사에 들러 쓴 것이라고 전한다. 한편,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이 있는데 이 바위는 의상대사를 흠모하던 당나라 선묘(善妙)낭자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 등에는 창건연대를 676년(신라 문무왕 16)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창건 후 부석사는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병화로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경내에 있는 대석단(大石壇)과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962년 지정)이 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음을 볼 때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원융국사비문」에는 원융국사의 탄생-출가-대덕-왕사-국사-부석사-입적까지 총 2263자(마멸 161자)로 새겨져 있다. 원융국사는 1041년(정종 7)에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통(華嚴宗統)을 이어받았고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 머물렀다.

 

이후 무량수전은 1358년(공민왕 7)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 큰 피해를 입었고, 1376년(우왕 2) 진각국사(眞覺國師) 원응(圓應)이 고쳐 지었다. 1611년(광해군 3)에는 보가 비바람에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듬해 중수하면서 서까래도 함께 교체하고 단청도 다시 하였다. 「무량수전불상개금기(無量壽殿佛像改金記)」와 「무량수전미타존상개금기(無量壽殿彌陀尊像改金記)」에 따르면 1723년(경종 3)과 1767년(영조 43)에 각각 본존불의 금칠을 다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는 조사당과 함께 해체수리공사가 이루어졌다. 1969년과 1999년에는 기와를 교체하였으며, 2001년에 주변 정비와 함께 정밀실측조사가 실시되었다.

 

 

 

태백산 부석사

 

 

 

부석사는 경사지를 따라 여러 단의 석단(石壇) 위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범종각을 지나면 진입축이 꺾이면서 높은 축대 위에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서 있다. 안양루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는 과정에서 무량수전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무량수전의 누하진입(樓下進入) 방식은 공간의 닫힘과 열림에 의해 호기심을 유도하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량수전 앞마당에 올라 무량수전을 뒤로하고 바라보는 소백산맥의 풍경도 아름답다.

 

무량수전은 지대석, 면석, 갑석 등을 잘 다듬어 조성한 가구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초석은 원형 주좌를 가공한 초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배흘림이 뚜렷한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여 있으며 바깥에 출목(出目)이 있다. 주두는 하부가 곡선형이며 굽받침이 있다. 주두 위에는 첨차 하부에 연화두형(蓮花頭形: 일명 쌍S자형 곡선)이 조각된 소첨차와 대첨차를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2고주 9량(梁) 형식이다. 툇보는 고주(高柱, 높은 기둥)의 머리부분에 결구되어 헛첨차가 받치고 있으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가늘어진다. 툇보 머리는 소첨차와 십(十)자로 짜이면서 짧은 장여와 외목도리를 받도록 했다. 고주 위에는 공포를 짜서 충방(衝枋)을 결구하고 그 위에 초공(草工)을 놓은 후 대들보를 걸었다. 대들보 위에는 충방과 초공을 놓고 종보를 걸었으며, 소슬합장이 종보 위에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추녀 하부에는 활주를 세워 받쳤다. 천장은 상부의 부재들을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塼石)을 깔고, 불상 위에는 닫집(唐家)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이지만 내부에 모신 불상은 석가모니불의 수인(手印)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불상의 종류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일반적인 불전은 건물 중심에 불단을 놓고 불상을 건물의 향(向)과 같게 한다. 그러나 부석사 무량수전은 불단을 건물 서쪽에 치우쳐 배치하고 불상이 동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부 바닥에는 본래 녹유전(유약을 바른 전돌)을 깔았었다. 이것은 아미타불이 서방(西方) 극락세계에 있고 극락세계는 바닥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불경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무량수전과 같은 평면 구성은 건물의 깊이를 확보하고 불단으로 향하는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구조적인 특징은 보와 도리 등 주요 가구재들을 단면 크기가 작고 곧은 부재를 사용하면서 뜬창방 · 뜬장여 · 충방 · 초공 · 귀잡이보 등 여러 부재들을 사용하여 보강한 것이다. 특히 보의 단면은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어 오래된 건축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 공포의 구성 형식, 가구재의 구성 등에서 주심포 건물의 기본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건축물과 비교할 때 장식적인 요소가 적으면서 목조 건축의 형태미와 비례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물 중 하나로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1962년 지정)과 함께 고려시대 불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건축물이다.

 

3. 덕사 웅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에 있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건물로 국보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올린 전형적인 주심포(柱心包)계 건물로, 11줄의 도리를 걸친 11량(梁)의 가구(架構)를 갖추었다.

 

건물은 곱게 다듬은 긴 댓돌을 여러 겹으로 포개어 쌓은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의 좌우에는 건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네모나게 다듬은 주춧돌의 윗면에는 기둥을 받치는 둥근 기둥자리가 낮게 마련되어 있다. 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정도가 뚜렷하지만, 건물 옆면의 가운데기둥은 단면이 네모나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이 둘러져 있고, 네 모서리기둥과 창방이 맞물려 있는 위치에는 앞면과 뒷면 쪽으로만 첨차(檐遮)를 끼워 놓았다. 첨차는 기둥머리 위에 짜인 쇠서[牛舌] 모양의 제공(諸工)을 받치고 있는데, 제공의 끝부분 위에는 짧은 장여를 놓아 외목(外目)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기둥머리 위의 첨차는 뜬장여와 장여, 주심(柱心)도리를 차례대로 받치는데, 뜬장여는 앞면 창방 위의 포벽(包壁)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편 옆면의 가구는 건물을 설계할 때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결구(結構)한 모습을 보여준다. 곧 창방 위의 유연한 맞배지붕 처마선 아래에 보이는 박공(牔栱) 부분의 구성은 참으로 일품이다. 협간(夾間) 중에 앞면 쪽에는 외짝의 빗살문을 달아서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창방 위쪽의 기둥머리에는 덩굴 무늬인 당초문(唐草紋)이 이어진 파련(波蓮) 모양의 받침을 놓아서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충량(衝樑)을 받았으며, 그 위에는 다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얹어 고주(高柱) 윗몸에서부터 나온 가로 부재를 받쳤다. 또한 그 위에는 지붕의 무게를 전달하는 동자 기둥을 받치는 보인 우미량(牛尾樑)이 놓여 있는데, 지붕의 무게가 마루보 밑의 우미량에서 대들보 위에 얹힌 우미량으로 전달되고, 다시 파련대공으로 받치고 있는 우미량으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우미량의 율동적인 구성은 마루보 위쪽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솟을합장의 곡선미, 2중량(二重樑)의 중량감있는 곡면(曲面)과 더불어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부재 사이의 작은 벽에는 수생화도(水生畵圖)·나한도(羅漢圖)·소불삼례도(小佛三禮圖)·극락조도(極樂鳥圖) 등의 불화(佛畵)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건립된 불교건물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불화는 지금은 모두 없어진 채, 벽은 노란색을 칠한 빈 벽으로 되어 있다.

 

건물 앞면의 3칸에는 모두 3짝의 빗살문이 달렸고, 뒷면에는 양쪽 칸에 창을 설치하고서 가운데칸에는 널빤지로 만든 판장문(板長門)을 두었다. 건물 안의 바닥에는 원래 전돌이 깔려 있었지만 지금은 우물마루가 덮여 있고, 뒤쪽벽의 가운데 고주 사이는 막아서 불화를 그리고 그 앞에 불단(佛壇)을 놓았다. 불단은 3개로, 가운데에 6각형 불단이 높게 자리하고 있으며, 양쪽에는 약간 낮은 4각형 불단이 위치해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은 서까래가 모두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1937년에 건물을 뜯어서 수리할 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 건물이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므로, 건립 연도가 확실한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이 건물의 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 내지 후기에 건립된 건물에 대한 편년이 시도되었다. 그 결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962년 지정)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962년 지정) 등이 더 오래된 건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제작 연도가 명확하고 형태미가 뛰어난 한국 목조건축사상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안동 가서 봉사하면 극락가고 예수 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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