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원
서원 두문자 : 옥경이 도안황 자파이 덕산조 화개서 파파성 화괴송 병안유
옥산서원 : 경주 이언적
도산서원 : 안동 이황
자운서원 : 파주 이이
덕천서원 : 산청 조식
화곡서원 : 개성 서경덕
파산서원 : 파주 성혼
화양동서원 : 괴산 송시열
병산서원 : 안동 유성룡
1. 옥산서원 : 경주 이언적
옥산서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조선전기 이언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96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72년(선조 5)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다음 해에 서악(西岳)의 향현사(響絃詞)에 있던 위패를 모셔왔으며, 1574년 ‘옥산(玉山)’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된 묘우를 비롯하여, 구인당(求仁堂)·암수재(闇修齋)·민구재(敏求齋)·무변루(無邊樓)·역락문(亦樂門)·신도비각(神道碑閣)·경각(經閣)·판각(板閣)·제기실(祭器室)·어서각(御書閣)·포사(庖舍)·정대문(正大門)·상당(上堂)·체인문(體仁門)·세심문(洗心門)·감생문(監牲門) 등이 있다. 체인묘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구인당은 강당으로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제기실은 향례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며, 암수재와 민구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또한 무변루는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고, 역락문은 무변루의 문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불역낙호(不亦樂乎)’의 뜻을 취하였다. 신도비각은 1577년에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셨으며, 경각과 판각에는 각종 판각 및 어서를 보관하였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7변(籩) 7두(豆)이다.
유물로는 필연(筆硯)·연수병(硯水甁)·관대(冠帶)·사모(紗帽)·마상배(馬上杯)·관영(冠纓)·옥적(玉笛)·직인(職印)·유서통(遺書筒)·옥관자·금관자·옥죽(玉竹) 2본과 『회재선생문집』 외 1000여 권의 문집과 책이 보관되어 있다. 1970년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보물, 1970년 지정)과 국내 최고의 활자본인 『정덕계유사마방목』 1책(보물, 1970년 지정), 『해동명적』 2책(보물, 1970년 지정)이 보물로 지정되었고, 이언적 수필 고본(古本)은 197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재산은 전답 2만 600평, 대지 3500평, 임야 35정보가 있다.
1967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서원은 전면에 강학처소(講學處所)를 두고 뒤편에 사당(祠堂)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문(樓門)인 무변루에 이르게 되며, 이 무변루 밑으로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의 안마당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구인당 좌우로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 잡고 있어, 구인당과 함께 강학처소를 이루고 있다. 구인당 뒤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이 있고, 체인문을 둘러싼 담장 안에 체인묘와 제기실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중심부 남측에는 부대시설인 고직사(庫直舍)·판각(板閣) 등이 있으며, 담장 밖 남측에 경각, 북측에 신도비각이 있다.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의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 위에는 주좌(柱座)를 둥글게 솟아오르도록 만든 초석들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圓柱)들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굽면이 사면으로 끊긴 주두(柱頭)를 놓고, 끝이 위로 향한 소 혀 모양 장식인 앙서[仰舌]가 뻗은 부재를 기둥 윗몸에서 내었다.안쪽으로는 기둥과 보 사이를 보강해 주는 보아지 형태로 하여 주두와 보머리를 결구하여 이익공(二翼工)처럼 보이지만, 부재의 구성 방법은 초익공식(初翼工式)이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그 위에 파련각(波蓮刻)으로 된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宗樑]를 받친 후, 여기에 꾸밈새인 첨차(檐遮)와 소호로 이루어진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이 우물마루로 된 대청과 좌우는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인당 앞쪽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민도리집 계통의 건축물이다.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기와집으로, 1층의 어간(御間)에 대문을 달고, 양측은 2층 온돌방의 구들과 아궁이를 두었다. 2층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이 양측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둘레에는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러 개방하였다. 구조는 초익공식으로 5량가구(五樑架構)를 이루고 있다. 중심 전각인 체인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초석들을 놓아 두리기둥(원형기둥)들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소 혀 모양 장식인 쇠서[牛舌]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을 취하고 있으며, 가구는 5량으로 겹처마를 이루고 있다.
경주의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도산서원 : 안동 이황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도산서원 → 안동 도산서원(2011.07.28)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서원은 조선 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하면서 사림세력이 지방에 설립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인재를 교육하는 강당이 있는 강학 공간, 존경하는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 있는 제향 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벌이며 휴식하고 교류하는 유식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인격을 갈고닦는 인성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조선 시대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 서원이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들은 한국 서원의 총체적인 특성을 보여 준다. ‘한국의 서원’은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세계유산 등재기준 (ⅲ)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이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 걸쳐 건립된 이들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교육과 사회 활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또 이 서원들은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제향을 올리고 강학을 하여 성리학 교육 체계를 만들고, 그것에 꼭 맞는 건물을 지어, 성리학 가치가 담긴 독특한 역사 전통을 만들어 가는 공간이었다.
‘한국의 서원’을 이루는 9개 서원
- 소수서원: 1543년에 최초로 건립. 건물, 공간의 기본 요소와 제향과 강학 관련 규정을 처음으로 수립하여 서원의 기준이 되었다.
- 남계서원: 1552년에 건립. 강학 공간의 뒤에 제향 공간을 배치하고 유식 공간까지 완벽하게 갖춘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 옥산서원: 1572년에 건립. 서원이 교육과 출판·장서의 중심 기구로 기능하게 된 것을 보여주며, 정문에 누마루 건축물을 처음으로 세운 서원이다.
- 도산서원: 1574년에 건립.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많이 미친 서원으로, 서원이 학문과 학파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필암서원: 1590년에 건립. 호남지역의 평탄한 지형에 맞추어 강당과 기숙사가 사당을 바라보도록 건물을 배치하여 예의를 표했다.
- 도동서원: 1605년에 건립.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원의 특징을 대표한다.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서 낙동강을 바라보게 건물을 세운 건축 배치가 탁월하다.
- 병산서원: 1613년에 건립. 만대루는 서원 누마루 건축 형태의 탁월한 사례이며, 서원의 역할이 교육기관에서 여론 수렴지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 무성서원: 1615년에 건립. 지역의 학문 부흥과 성리학 전파에 힘쓴 서원이다. 향약의 바탕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항일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 돈암서원: 1634년에 건립. 성리학의 실천 이론인 예학 논의의 산실이며, 예학을 건축으로 표현한 강학당인 응도당이 탁월하다.
3. 자운서원 : 파주 이이
자운서원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있는 조선후기 이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0년 (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고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보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6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서원의 좌측 능선에는 이이와 양친의 묘소가 있고, 근처에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설립한 율곡교육원이 있다.
사우에는 이이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은 1973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묘정비는 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매년 8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5변(籩) 5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2,000여 평과 약간의 대지가 있다.
4. 덕천서원 : 산청 조식
덕천서원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조선전기 조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며 보관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 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며, 양력 8월 10일 남명제(南冥祭)를 행하고 있다.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이 서원은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유물로는 조식의 수묘사성현병풍(手描四聖賢屛風) 외 문집 약간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9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
5. 화곡서원 : 개성 서경덕
화곡서원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조선후기 서경덕 등 4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이다. 1609년(광해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경덕(徐敬德)·박순(朴淳)·민순(閔純)·허엽(許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같은 해에 ‘화곡(花谷)’이라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693년(숙종 19)에는 숙종이 친히 행행(行幸)하여 치제(致祭)하였고, 1740년(영조 16)에는 영조가 행행하여 친림(親臨) 치제하였다. 그 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위패는 땅에 묻고 재산은 향교재단으로 흡수하였다.
6. 파산서원 : 파주 성혼
파산서원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있는 조선전기 성혼(성수침)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568년(선조 1) 백인걸(白仁傑)·이이(李珥) 등의 관료와 파주 일대 유생의 발의에 의하여 적성현감 성수침(成守琛)을 제향하고, 유생의 장수처(藏修處)로 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명종 때 도학과 청절(淸節)로서 이름이 높아 당시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원은 선조 초에 있어 기호사림이 중심이 된 서인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이 동인(東人)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1650년(효종 1) 비로소 파주 유생 백홍우(白弘祐) 등의 청액소(請額疏)를 계기로 사액을 받게 되었다.
1628년(인조 6)성혼을 추가 제향하고, 1705년(숙종 31)백인걸의 위패를 인근 자산서원(紫山書院)으로부터 옮겨와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5년(정조 9)성수침의 동생 성수종(成守琮)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퇴락하여 현재는 사묘(祠廟)만 남아 있으며,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사묘에는 성수침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성수종·백인걸·성혼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7. 화양동서원 : 괴산 송시열
화양동서원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1695년(숙종 21)에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이곳에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데다가,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의 필적을 구하여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친히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 각자(刻字)하여 존명대의(尊明大義)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에 걸쳐 44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 서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건립 당시부터도 첩설(疊設: 거듭 설치하다)이라는 소론(少論)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한 적이 있고, 사액을 받을 때도 예조에서 첩설서원이라 하여 방계(防啓)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노론측의 강경한 요구와 왕의 특별 배려로 허용되었다. 사액은 1696년 대사성 이여(李畲)가 경연에 입시한 틈을 타서 사액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뒤 소론과의 당쟁에서 송시열이 노론측 정치 명분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이 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었다.
숙종 말년의 노론 집권시기에는 국가에서 유례없이 20결(結)의 토지와 많은 노비를 지급받았으나, 반면 경종 때 소론집권하에서는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고 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이 기증하여 서원 소속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가서 제수전(祭需錢)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가 때로는 관령(官令)을 능가할 정도였고, 이를 거부하는 수령에게는 통문(通文)을 보내어 돌려 쫓아내려고 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또 춘추 향사 때의 유생 공궤(供饋: 음식을 드리는 것)를 빙자하여 복주호(福酒戶)와 복주촌(福酒村)을 운영, 양민을 피역(避役: 부역을 피하는 것)시키면서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백성은 사형(私刑)을 가하는 등의 민폐를 심하게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폐습이 노론정권이 봐도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지자, 1858년(철종 9)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에 의하여 복주촌은 영구히 폐지되었고, 지방관에 대한 징구(徵求)도 심한 통제를 받았다.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한 서원·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의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 이면에도 실은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의종과 신종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조선시대 당시 청주 화양동에 있었음)와 함께 화양동서원의 폐단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71년(고종 8) 노론 사림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었고 묘정에 있던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깨져 현재는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8. 병산서원 : 안동 유성룡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명칭변경: 병산서원 → 안동 병산서원(20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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