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다포 양식 : 석 응 성 응 상 보
석왕사 응진전
성불사 응진전
상원사 보광전
1. 석왕사 응진전
석왕사 응진전은 북한 강원도 안변군 설봉산(雪峯山)에 있는 고려후기 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 절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석왕사의 창건이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이능화(李能和)는 다만 숭불호법(崇佛護法)을 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는 1377년(우왕 3)에 이성계가 정몽주(鄭夢周)·이화(李和) 등과 함께 청주(淸州: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에 갔을 때 해양(海陽: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광적사(廣積寺)가 병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대장경(大藏經) 1부와 불상 및 법기(法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남운(金南運)을 보내 이들을 보완한 뒤 석왕사에 봉안하고, 오랫동안 임금을 축수(祝壽)하고 나라의 복을 빌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석왕사에서 가까운 설봉산 귀주사(歸州寺)에서 독서를 하고 지낸 사실과 이성계와 무학에 얽힌 설화 등으로 미루어 석왕사의 창건은 이성계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성계가 석왕사로 대장경을 옮긴 1377년 이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應眞殿)을 세워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天眞堂)·진헐당(眞歇堂)·인지료(仁智寮)·용비루(龍飛樓) 등을 지었다. 왕이 된 뒤에는 거찰(巨刹)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洞口)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 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暎月樓)·흥복루(興福樓)·범종루(梵鐘樓)·용비루(龍飛樓)·조계문(曹溪門) 등을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웅전·응진전·팔상전·명부전·해장전(海藏殿)·극락전·석왕사(釋王寺)·인지료·신한각(辰翰閣)·운한각(雲漢閣)·천서각(天書閣)·만춘각(萬春閣)·백련당(白蓮堂)·진헐당·심검당(尋劍堂)·수군당(壽君堂)·보명전(普明殿)·연빈관(延賓館)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었다.
2. 성불사 응진전
성불사 응진전은 북한 황해북도 황주군 성불사에 있는 고려후기 에 창건된 사찰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인 다포계(多包系) 단층 맞배지붕건물이다. 배흘림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이 위에 안팎 모두 1출목(一出目)인 간결한 포작(包作)을 짰다.
바깥두리기둥[外圓柱]에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놓고 공간포(空間包)를 짜올려 다포계 형식을 취한 반면, 내부 고주(高柱) 위에는 굽받침이 있는 곡주두(曲柱頭), 곡소로[曲小累], 단면이 쌍S자 모양인 첨차(檐遮) 등 주심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고려 말기의 절충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외부로 나온 첨차의 쇠서[牛舌]는 끝 부분이 둔하게 잘려 있고 아래쪽으로 쳐져 있으며, 첨차에서와 같이 공안(空眼 : 건축물에서 구멍·총혈 등의 총칭)을 깊이 파내는 등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보의 단면은 위가 굵고 아래가 가는 항아리 모양이며,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 마루도리 밑에는 파련(波蓮)을 새긴 부재와 포(包)를 섞어서 만든 대공(臺工)을 세웠다. 또 마루보 위에 ㅅ자 모양 대공을 두어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건축 가운데 오래된 법식(法式)을 따른 귀중한 예이다.
한편, 일제침략기에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발견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27년(충숙왕 14)에 처음 지어 1530년(중종 25) 에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불사 내의 극락전과 함께 한국 목조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이다.
3. 대전사 보광전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보광전은1976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그 건축년대(1672년, 강희 11년 임자 5월초 119일, 현종 13년)가 밝혀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송 대전사 보광전의 건물 구조는 화강석 기단위에 화강석 초석을 놓고 약간 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워 구성된 정면3칸, 측면3칸의 건물이다. 지붕은 전면에만 부연을 단 겹처마의 맞배지붕이고, 구조는 2고주 5량가구이며, 다포계 양식으로 외 2출목 3제공, 내 2출목 3제공을 이루는데 전면은 앙설형이고 배면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목조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 대전사 보광전은 건축연대가 명확한 조선중기 다포양식의 목조건물로서 공포양식 등에 있어서 중기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내부단청과 벽화는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건축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조선중기 불교미술의 중요한 자료로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걸고 그 위에 포작(包作)을 짜올리는 형식이다. 우리 나라 목조건축양식 중에서 가장 장중하고 복잡한 구조와 형식을 가지는 것으로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중국에서는 요대(遼代)부터 다포양식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송·원대는 일반적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송대는 ≪영조법식 營造法式≫이라는 건축기법에 관한 서적이 발간되어 다포계 형식의 규범을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이른바 ‘쓰메구미(詰組)’라고 하여, ‘가라요(唐樣)’ 또는 ‘젠슈요(禪宗樣)’의 건축이 이루어졌던 가마쿠라(鎌倉)시대에 다포양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형식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목조건축 자료를 통하여 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건축 이외에도 다포양식의 채용을 알려 주는 몇 가지 자료가 남아 있어 주목되고 있다.
우선,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의 공예품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불감(金銅佛龕)은 공간포의 구조형식을 가지는 목조건조물을 묘사한 최초의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나라의 공래반타사우변상도(卭崍盤陀寺右變相圖)에서와 같이, 평방 없이 창방에 전형화된 다포계 양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고려시대의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1323, 일본 知恩院 소장)는 연대가 뚜렷한 고려시대의 건축에 관한 자료인데, 여기에서는 창방 또는 평방으로 보이는 부재만 걸고 그 위에 포작을 배열한 것이 완전한 다포계양식을 표현하지는 못하였지만 주심포나 공간포의 포작을 평방 위에 배열하고 있는 것이 많아, 이 시기에는 전형적인 다포계양식이 사용되었음이 추측된다.
이 변상도의 연대는 고려 말기이므로 북한에 있는 심원사(心源寺) 보광전(普光殿, 1374), 석왕사(釋王寺) 응진전(應眞殿, 1384) 등의 건립연대와 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어, 이 시기에 전형적인 다포계양식이 사용되었음을 확실하게 한다.
그런데 위에 나타난 다포계양식의 공포구조와 양식을 보면, 첨차(檐遮)의 모양이 교두형(翹頭形 : 밑면 끝을 활이나 원호모양으로 깎아낸 모양)으로서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나는 첨차에서 많은 변화가 없이 사용된 듯하나, 그 출목(出目) 수에서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내외삼출목 등의 구조형식을 보임은 다포계양식으로서의 구조형식이 이미 많은 발전을 보이는 증거라고 할 수 있어, 전형적인 다포계양식의 시작은 적어도 고려 중기 이전으로 볼 수도 있다.
다포계의 초기적 양식을 보여 주는 것은 위에 예시한 건물 외도 봉정사 대웅전, 성불사(成佛寺) 응진전(應眞殿), 개성 남대문, 평양보통문(普通門), 서울 남대문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의 특징으로는 내외출목수를 같게 한 예가 많고 첨차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으나, 그 끝이 원형의 곡선이라기보다는 ≪영조법식≫의 권쇄법(卷殺法)에 따라서 모를 죽인 듯이 끝을 수직으로 깎아내려 밑에서 몇 번 곡을 두어 깎아굴렸다.
또, 대부분의 경우 첨차 위에는 공안(栱眼)을 깎아 고식(古式)을 나타내고 있으며, 살미[山彌] 바깥 끝의 쇠서[牛舌]는 하앙재(下昻材)와 같이 밑으로 처져 끝이 무디게 잘려져 있고, 두공(頭工) 살미의 내부 끝은 교두형으로 이루어져 양봉(樑奉)의 초가지 문양을 하지 않고 있다.
구조적으로는 기둥에 배흘림(entasis)을 두고 종보[宗樑] 위에서 ㅅ자 대공(臺工)과 파련대공(波蓮臺工) 또는 포대공(包臺工)을 쓰고 있어 주심포계에 속하는 부재(部材)를 사용하고 있다. 보의 단면도 주심포계의 것과 같이 곡을 가지게 한 것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밑의 모서리를 굴려 원형의 곡을 이루어 상부는 평평하게 자르고 있다.
보의 뺄목이나 한대의 끝도 정연하고 차분한 삼분두(三分頭 : 보머리·장여뺄목 등의 끝을 세번 꺾어 잘라낸 형식의 끝머리)로 깎았다. 내부 반자는 초기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봉정사 대웅전과 같이 뒤에 반자를 단 것으로 보이는 것도 지붕은 보통 팔작지붕이 많으나, 맞배 및 우진각지붕 등 여러 구조로 사용되었다.
다포계의 중기적인 양식의 예는 관룡사(觀龍寺)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법주사 팔상전, 쌍봉사(雙峰寺) 대웅전,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장곡사(長谷寺) 하대웅전, 전등사 대웅전, 창경궁 명정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특징으로는 공포구조에 있어서 첨차의 끝이 초기적인 것과 달리 약간씩 경사를 이루어 끊기는 것도 있고, 밑면은 원호에 가깝게 또는 기하곡선에 가깝게 깎고 있다.
쇠서도 끝이 약간씩 날카로워질 뿐 아니라 끝을 쳐들어 위에서부터 곡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출목수도 이출목 이상인 것이 비교적 많으며, 또 공안도 퇴화되어간다. 양봉이나 살미에 문양을 이룬 틀에는 연봉오리를 나타내는 화두자(花頭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구적으로는 기둥의 배흘림이 약화된다.
또, 보와 대공 등의 장식이 없어지고 구조적인 부재로 짜여져서 이들을 가리기 위한 반자를 두게 된다. 공포 내부에서 끊기고 보뺄목을 대신하여 한대(漢代)와 같이 익공형 또는 초가지형의 날카롭고도 화려한 문양으로 변한다.
다포계의 후기양식으로 서울 동대문, 덕수궁 중화전, 해인사 대웅전, 신륵사(神勒寺) 대웅전 등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공포의 부재가 섬세하고 장식적이며, 기둥 위에는 안초공(安初工)을 놓고 쇠서는 길게 뻗어 나약한 감을 주며, 쇠서 위에는 수서[垂舌]를 장식하고, 살미 내외의 사이에는 운공(雲工)·연봉 등 복잡한 장식을 지나치게 하고 있다. 단, 출목수도 많아지고 내외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또, 구조적으로는 기둥에 배흘림이 거의 없어지고 있으며, 팔작지붕의 합각부분을 크게 만들어 건물이 겉으로 보기에 지나치게 허식적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다포계양식은 주심포계양식보다는 뒤늦게 성립 발전되어 온 것으로, 그 주요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포작은 기둥 위 주심에서만 짜올리지 않고 기둥 위에 평방(平枋)을 올려 사이에도 포작을 배치 배열하여 지붕 하중을 받게 하므로 주심포작보다 하중의 분배와 전달이 유리하다.
둘째, 창방과 평방을 같이 가설하여 그 위에 여러 단의 포작이 출목을 두어 짜므로 건물의 높이가 웅장하게 높아지고 내부공간도 커진다.
셋째, 내부공간의 확대와 가구(架構)의 복잡성 때문에 내부에 반자를 설치하여 위의 가구가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
넷째, 건물을 더 웅장하게 하기 위하여 팔작지붕을 많이 쓰게 된다.
다섯째, 공포부재 이외의 많은 부재들이 규격화되어 시공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즉, 기둥의 배흘림도 약화되고 보의 단면도 항아리 입면형에서 사다리형·사각형·반원형 등으로 단순화되어 가고 첨차도 교두형으로 쓰이게 된다.
여섯째,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완주화암사(花巖寺)극락전(1605)과 같은 하앙식(下昻式)의 건축구조 또한 하앙을 가지는 다포계양식의 한 예라 볼 수 있는데, 청동탑 등에서 엿보이는 하앙식으로 추정되는 것에는 주심포계의 하앙식의 구조가 많다. 하앙식 구조를 별개의 양식으로 분류할 것인가, 다포계와 주심포계에 포함시킬 것인가는 아직 논의된 바가 없다. 하앙은 공포 위 또는 그 중간에 중도리 또는 뜬창방, 기둥 등에서 물려 밖으로 경사져 길게 빠져나와 처마도리를 받드는 부재를 가지는 구조형식을 하고 있어 처마를 길게 뻗어줄 수 있다. 화암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공포의 전후면에만 평방을 돌려 배열하였는데, 공포는 제2제공(第二諸栱)까지는 일반 다포계의 건물과 같고 그 위에 하앙을 두고 있음이 특징이다.
일곱째, 다포계의 건축에서도 공포와 공포 사이에 작은 불감형(佛龕形)의 포벽이 이루어져 여기에 불화를 그려 위엄을 높일 뿐만 아니라, 내부출목 끝 반자 밑에 또 한 단의 당골벽이 이루어져 여기에도 화반과 화반 사이에 불화벽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다포계양식은 구조가 복잡하고 화려하여 조선시대는 주로 궁전이나 사찰건축의 주전(主殿) 등 권위적 건물에 많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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