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1910년대 북간도 독립군 두문자 : 간 중 의

by noksan2023 2025. 1. 12.
반응형

1910년대 북간도 독립군 두문자 : 간 중 의

 

 

간도의 범위

 

 

 

간 : 민회

중 : 광단(대한정의단)

의 : 민단(천주교 무장단체)

 

 

1. 민회

 

 

간민회

 

 

 

간민회라 함은 1913 북간도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애초에는 회명을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라 하였으나 중국 당국이 ‘자치’라는 말을 삭제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간민회라 하였다.

 

1913년 1월 26일 이동춘(李同春), 김립(金立) 등 25인 발기인은 150여 명이 집회한 가운데 간민회설립협의회를 개최하였다. 4월 26일백옥보(白玉甫)가 간민회총회 임시회장으로 선출되어 간민회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회장에 김약연(金躍淵), 부회장에 백옥보가 선임되었다. 또 민적과(民籍課), 교육과, 법률과, 재무과, 식산흥업과(殖産興業課) 등등 9개 부서 임원을 임명하였다.

 

이후 연길·화룡·왕청 등 3개 현에 분회를 세웠고 분회 아래 많은 지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교민에 관한 모든 사항들을 자치적으로 해결하여 중국 관헌도 한인문제는 간민회와 협의하였다. 또한, 교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조성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북간도지방은 후일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북간도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이후에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편되었다.

 

 

2. 광단(대한정의단)

 

 

중광단

 

중광단(重光團)은 1911년 3월 북간도에서 대종교단(大倧敎團)에 의해 설립된 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7년부터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북간도의 3 · 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1911년 3월 북간도로 망명한 대종교단에 의해 왕청현(汪淸縣)에서 설립되었다. 서일이 단장이었으며 백순, 현천묵, 박찬익, 계화, 김병덕(金秉德)[김성(金星)], 채오(蔡伍), 양현(梁賢), 이홍래  대종교의 간부들이 참여하였다.

 

무장투쟁을 지향하였으나 무기를 갖출 여력이 없었기에 한인 사회의 역량 강화에 주력하였다. 재만 한인의 실력 양성을 위해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25개에 이르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나 교사로 활동하며 학교를 운영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6년 대종교 제2대 도사교에 오른 김교헌이 이듬해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외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왕청현을 대일 항쟁을 근거지로 삼고 고평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민복(李敏馥)을 니콜스크-우수리스키에, 백순을 북만주 밀산(密山)에, 진학신(秦學新)을 북만주 소수분(小綏芬)에 파견하여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세력들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백순은 이범윤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 국경 지방을 순회하며 의병 모집을 하였다. 1918년 10월 계화는 폭탄 제조인을 고용해 길림(吉林)으로 가기도 하였다. 김성 · 정신 파리평화회의 대표단으로 파견하였으나, 중도에 귀환하고 말았다.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대종교인들을 모아 왕청현, 안도현(安圖縣), 연길현(延吉縣)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 13 용정 만세시위운동 직후에는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대일 항전을 위한 인적 지원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비밀조직 '자유공단(自由公團)'을 결성하고 매월 1인당 1원씩 회비를 징수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5월 대종교단이 대일 항전의 실행 단체로 대한정의단을 설립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3. 민단(천주교 무장단체)

 

 

의민단

 

의민단 1919년 북간도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왕청현(王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천주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독립단으로 단장 방우룡(方雨龍, 또는 方渭龍), 부단장 김연군(金演君), 참모장 김종헌(金鍾憲), 영장(營長) 허은(許垠), 서무부장 정준수(鄭駿秀), 재무부장 홍림(洪林) 등이 주축이 되었다.

 

재정은 천주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였으므로 다른 단체에 비하여 윤택하였다. 한때는 홍범도(洪範圖)와도 제휴하여 활동하였으나, 그 뒤 분리하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국내진공이었고, 조직이 강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여 군무보고를 하였고, 그 지시를 받았다. 대원은 약 300명이었으며, 소총 약 400정, 권총 약 50정, 수류탄 약 480발을 소유하여 충실한 군비를 갖추었다.

 

1920년 6월 이후 국민회·북로군정서·광복단·의군단(義軍團)·신민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의 조정으로 연합활동을 폈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노령 자유시에 가서 참변을 겪고 해산하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