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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17세기 건축물 두문자 : 금미화각 법팔

by noksan2023 2025.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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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건축물 두문자 : 금미화각 법팔

 

 

17세기 전환기 건축 특징_공주 갑사 대웅전

 

 

 

금 : 산사

미 : 륵전

화 : 엄사

각 : 황전

법 : 주사

팔 : 상전

 

 

1. 산사 륵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 미륵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에 있는 조선후기에 창건된 사찰건물을 말한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건물이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봉안한 불전으로, 일명 용화전(龍華殿)·산호전(山呼殿)·장륙전(丈六殿)이라고도 불린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의 편액이 붙어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한 대찰로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眞表)가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 건물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 수문(守文)이 재건한 뒤, 네 차례에 걸친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커다란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워 창방(昌枋)을 걸고 평방(平枋)을 놓아, 공포를 주상(柱上)과 주간(柱間)에도 짜올린 다포식건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으로 주간에는 공간포(空間包)를 1구씩 두었고, 살미첨차[山彌檐遮]의 끝은 모두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섬약하며, 연봉(蓮峰)을 새김한 것이 조선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내부는 3층 전체가 툭 터진 통층으로, 초층에 네 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이 고주와 변주(邊柱) 사이에 퇴량(退樑: 툇간에 건 보)을 걸었다. 이 퇴량 위에 2층의 변주들을 세워 이 변주들과 초층에 세웠던 고주들 사이에 커다란 퇴량을 걸었다. 3층에서는 1층부터 올라간 고주들이 그 변주가 되었다.

 

이와 같은 가구법(架構法)은 목조탑파에서 하나의 심주(心柱)를 세워 보[樑]들을 심주에 걸던 수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 법당은 목조탑파의 가구법이 아니라 3층전각의 가구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내부의 공포에 있어 초제공(初諸工)과 이제공(二諸工) 모두의 살미첨차 끝은 한 판(板)으로 붙은 운형(雲形)으로 조각되어,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추녀에는 모두 활주를 세워서 떠받치고 있다. 중앙의 본존은 도금한 소상(塑像)으로서 높이 39척 (11.82m)의 입상이며, 좌우의 보처불(補處佛: 主佛의 좌우에 모신 보살)은 높이가 각각 29척(8.79m)으로 역시 동일한 입상으로 되어 있다.

 

 

2. 엄사 황전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각황전은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에 있는 조선후기에 중건된 사찰건물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화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로서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각황전은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 건물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3여래(三如來)와 보혀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知積菩薩) 등 4보살(四菩薩)을 봉안하고 있다.

 

화엄사는 1636년(인조 14)에 작성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華嚴寺事蹟)」 등 여러 문헌에서 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각황전은 본래 장륙전(丈六殿)으로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3층 7칸으로 건립하였으며 내부에는 화엄경 원전을 엷은 청색 돌에 새긴 화엄석경(보물, 1990년 지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 사경(寫經: 후세에 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 베낀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경내의 석조물들과 화엄석경의 글씨체도 8세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엄사와 장륙전은 8세기에 중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화엄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화엄사는 1630년(인조 8) 벽암대사가 중건을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에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1699년(숙종 25)에는 벽암대사의 제자인 계파 성능선사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4년 동안 중창불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장륙전은 1702년(숙종 28) 중건되었으며 2층 7칸으로 전보다 층수가 줄어들었다. 완공 후 숙종은 자신이 직접 쓴 ‘각황보전(覺皇寶殿)’이라는 편액을 내려 이때부터 각황보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3여래와 4보살상을 봉안하였는데 중건 이전에는 금산사 미륵전처럼 입상(立像)이 모셔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은 1768년(영조 44), 1847년(헌종 13), 1851년(철종 2)에 각각 중수하고, 1860년(철종 11)에는 후불탱화 3폭을 조성하여 후불벽에 걸었다. 1885년(고종 22)에 또다시 중수하였고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해체 · 보수되었다. 1961년에 보수한 뒤 이듬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부분적인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화엄사는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거쳐 중심 영역으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보제루 옆을 지나면 동 · 서 5층석탑이 있는 넓은 마당이 나오고 높은 석단 위에 각황전, 대웅전, 원통전 등 주요 불전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제루와 축을 이루며 남향하고, 각황전은 대웅전과 직각 방향으로 서향하고 있다. 배치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동 · 서 5층석탑이 대웅전과 각황전의 중심축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비켜서 있다는 것이다. 화엄사에는 2개의 주불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주불전으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각황전에 오르는 계단보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을 넓게 구성한 것도 높은 각황전이 먼저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웅전을 향해 시각과 동선을 유도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각황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마당 중앙에는 6.4m 높이의 석등(국보, 1962년 지정)이 자리한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각황전은 기둥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架構式)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 중건하면서 기존에 있던 기단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석은 원형 주좌를 새긴 사각형의 가공초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위 · 아래층 모두 내외 2출목(出目) 구조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소첨차와 대첨차가 사용되었다. 초제공과 2제공은 쇠서가 위를 향해 뻗은 앙서형(仰舌形)이고, 3제공은 익공(翼工)이며, 4제공은 운공(雲工)이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전체적으로 볼 때 3고주 9량 형식이다. 아래층 바깥 기둥열의 평주와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는 퇴보를 결구하고 퇴보 위에는 위층 변주(邊柱)를 세웠다. 위층 퇴보는 아래층 퇴보와 마찬가지로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다.

 

대들보는 위층 기둥과 내부 최고주(最高柱: 가장 높은 기둥)에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었으며 아래쪽에는 고주를 세워 받쳤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최고주와 함께 종보를 결구하였으며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장은 모두 우물반자를 시설하였는데 주심도리에서 하중도리까지는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현존하는 중층불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가구 구조는 아래층에서 반 칸씩 줄여 위층을 구성한 반칸물림방식으로, 조선 후기 중층건물의 구조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공간은 층의 구분 없이 통층(通層)으로 구성하여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형 공간에는 최대한 빛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래층에는 사방에 많은 창호를 설치하였으며 위층은 벽체 대신에 채광창을 두었다. 바닥에는 본래 전돌을 깔았으나 1998년에 예불의 편의를 위해 마루를 설치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웅장하면서도 안정된 균형감과 엄격한 조화미를 보여주며 건축기법도 뛰어난 건축물이다. 내부에 봉안된 7구의 불 · 보살상과 후불탱화도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주사 상전

 

 

법주사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에 있는 조선시대 목조 5층 불탑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5층의 높은 건물로 5층 옥개(屋蓋)는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다.

 

건물은 각 면에 돌계단을 가진 비교적 낮은 석조기단 위에 섰으며,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꽂혔다. 공포는 2출목(二出目)으로 출목의 끝은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나, 점차 형태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波蓮刻)을 가졌다.

 

2·3·4층의 공포는 모두가 기둥 위에 놓이기는 하나 다포(多包)집 양식의 공포이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平枋)을 돌려 완전한 다포집 양식이 되었고, 공포는 주두(柱頭: 대접받침) 위에만 있으나 형태는 역시 다포집 양식의 것이다.

 

이와 같이 1층은 주심포(柱心包)이고, 2층 이상은 다포집 양식의 포작(包作)은,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나 쌍봉사 대웅전(雙峰寺大雄殿) 등 3층 건물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는 특수한 수법이다. 내부 가구는 평면 가운데에 심주(心柱)가 있고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隅高柱]를 세웠으며, 2층의 모서리기둥[隅柱]은 1층 변주(邊柱: 변두리기둥)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 세워졌다.

 

3층 역시 귀고주와 2층 변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 그 기둥을 세우고, 4층 변주는 귀고주가 바로 4층 변주가 된다. 이 귀고주는 심주와 대량(大樑)으로 연결되며, 5층 변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서게 되었다. 심주는 기단 윗면 심초(心礎) 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러한 가구방식은 금산사미륵전의 가구방식과 같은 계통의 수법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평면 4각형의 5층 목탑이다. 기단부는 석조로 구성되었으며 탑신은 5층의 목조 부재를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상륜부는 철제로 제작되었다. 기단부 사방에는 계단을 마련하여 어느 방향에서나 탑 내부로 들어가기 용이하게 만들어졌다. 탑신부의 1층과 2층의 주간거리는 5칸이며 3층과 4층의 주간거리는 3칸, 5층은 2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상층으로 올라가며 주간거리가 체감되었다. 건물 내부는 사방이 통하도록 했으며 건물 중앙에는 가장 높은 기둥인 심주가 1층부터 5층까지 관통하고 있다. 심주를 둘러싼 사방에는 사천주라 불리는 네 개의 기둥이 가운데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세워졌으며 심주와 결합되어 있다. 사천주는 1층부터 4층까지 세워져 있다. 심주 아래에는 심주를 받치는 주춧돌인 심초석이 있으며 심초석 윗부분에 구멍을 파서 사리장치를 보관하는 사리공을 만들었다. 사리공은 벽돌로 덮여있었고 그 안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각 층의 양식과 목재를 결합한 수법이 조금씩 다른데, 1층에서 4층까지는 지붕을 떠받치기 위한 처마부의 공포가 기둥위에만 마련된 주심포식이고, 최상층인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며 지붕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도록 했다.

 

팔상전은 바닥면이 넓고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체감 비율이 큰 입면형식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목조탑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구조적 측면에서 고층탑에서 문제시 되는 수평외력에 대한 장인들의 합리적 대응으로 해석되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의 체감 비율은 시각적 안정감을 주어 친밀한 인간적인 척도(human scale)를 부여하기 위한 구조적 개념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팔상전 기단 상면을 덮는 평평한 판석인 상대갑석 위에는 1층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 위에 기둥을 설치하는 방법은 기단 안쪽에 초석을 설치한 후 기둥을 초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팔상전 기단 위에는 1층 기둥이 바로 올려져 있어 기단 안으로 설치되어야 할 기둥이 잘못 처리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은 오히려 하부구조에 충분한 구조적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시공기법이고 역학적으로도 기단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법이라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팔상전은 일반적인 중층형 건물이 아니라 목탑이기에 평면형태가 정사각형이다. 이러한 이유로 목탑 지붕의 4면 모두 처마곡선을 잡기 유리하며 현재 팔상전 지붕 처마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팔상전의 전체적 형태는 안정적인 체감비를 보여주며 동시에 처마에서 부드러운 곡선미를 성공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팔상전의 내부는 심주를 기준으로 하여 사천주가 에워쌌으며 사천주 사이는 벽체를 형성한 후 각 벽체마다 2개씩의 팔상도를 걸어놓았다. 사천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벽체는 구조적인 중심이 되며 동시에 종교적인 중심 벽면이 된다. 또한 벽체 주변에는 불단이 설치되어 있다.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는 동에서부터 남·서·북으로 돌아가며 그려져 있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탑 내부의 퇴랑에서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팔상전은 한국 장인들의 목조탑 건축기술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구조적 형식과 미학적 특징의 본질을 살펴보면 놀라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팔상전 구조형식의 근본은 사천주와 귀틀로 짜여 진 팔상전 중심에 있는 사각틀이 수직과 수평의 힘을 받치며 동시에 탑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는 데 있다. 팔성전의 5층에서는 수평력에 대한 보강구조로 귀틀이 적용되어 있고 하부층에는 수평력에 대한 보강과 함께 안정적 입면을 고려한 목조 중층건물 가구기법이 적용되었다. 즉, 팔상전은 고탑에서 문제시되는 횡압에 대한 취약함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적 성능과 함께 안정적인 입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상전 가구의 평면 및 입면은 전후 및 좌우로 대칭을 이루어 구조적인 균형과 안정적인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팔상전 각부 및 전체 가구의 구조형식에는 불필요하게 첨가된 부분이 없으며 탑 본래의 구성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탑의 기본개념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구조적으로 발전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장인들은 구조역학적 공식이나 수식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역학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터득하여 중력과 자연의 구조적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법주사 팔상전은 고층목조건물로서의 구조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함과 동시에 종교적 상징성과 건축 용도에 부합하는 기능적 측면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킨 목탑이다. 팔상전은 한국 고건축 중에서 합리적 구조와 종교적인 기능, 친근한 외관미를 합치시켜 이들을 가장 훌륭하게 처리한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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