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건축물 : 안 석 논 상 부 개
안 : 안성
석 : 석남사
논 : 논산
쌍 : 쌍계사
부 : 부안
개 : 개암사
1. 안성 석남사
안성 석남사 대웅전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석남사에 있는 조선후기 에 창건된 사찰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 1981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사지(寺誌) 등이 없어 분명하지 않지만 암막새에 새겨진 명문에 ‘雍正三年己巳三月日造成(옹정3년기사3월일조성)’이라고 되어 있어 1725년(영조 1)에 해당되는 시기를 알 수 있으며 구조의 기법으로 보아 법당의 중건연대와 합치한다고 할 수 있다.
대웅전은 영산전(靈山殿)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높게 쌓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고대(高臺) 위, 산 중턱의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자리잡았다. 자연석의 주초석 위에 둥근 나무기둥을 세웠는데 높이가 영조척(營造尺)의 8자(약 2.5m) 정도이다. 귀기둥은 굵고 약간의 솟음이 있으며, 굵은 기둥은 원목에 가깝게 다듬어서 매우 천연적이다. 창방(昌枋) 위로 평방(坪枋)을 얹었는데 창방 높이 8치에 비하여 6치밖에 안 되는 나약한 것이고 그것도 두 가닥 재목을 맞이은 부재여서 매우 취약하다. 공포(栱包)는 다포계에 속하며 주간(柱間)에 두 개의 공포를 더 배치하였다. 맞배집이어서 측면으로는 공포구조가 계속되지 않으므로 귀기둥 위에서 마감시키느라 애를 썼는데 앞쪽의 처리와 뒤쪽의 정리에 차이가 있다. 이는 행공첨차를 토막처럼 만든 기법과 더불어 고려 말기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문은 보편적이나 사분합 문짝은 1985년도에 새로 설치하였다. 하방(下枋)은 주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이에 걸렸으며, 하방에 의지하고 귀를 걸어 우물마루를 설치하였는데 매우 어색하다. 이는 원래 맨 바닥으로 방전(方塼)을 깔았던 구조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부의 가구(架構)는 새로 구조한 빗천장으로 가려져서 다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대들보에 동자주를 세워서 하중보를 받치고 그 위에 다시 종보를 얹어 판대공을 받치고 종도리를 얹게 된 것으로 보아 9량집[九樑架]으로 보인다. 새로 고친 불단 위에 본존상이 있고 머리 위에 닫집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층의 보궁형으로 꾸민, 매우 드문 유형이다. 단청은 1985년에 새로 하였다.
2. 논산 쌍계사
논산 쌍계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작봉산(鵲峰山)에 있는 고려전기 에 창건된 사찰을 말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이 절의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739년(영조 15)에 세운 중건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4년 보물로 지정된 논산 쌍계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봉황루(鳳皇樓)·영명각(靈明閣)·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문병·봉설(鳳舌)·용두(龍頭)의 장식과 문양이 화려하며, 내부에 봉안된 삼존불 위에는 각기 다른 닫집을 달아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정면의 꽃살문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보기 드문 것이다. 특히, 오른쪽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덩굴로 만든 것인데,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봉황루는 2층의 누각으로서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한 고색이 짙은 건물이며, 영명각은 행정당국이 금강유역을 개발하면서 연고가 없는 무덤의 혼백을 모아 봉안한 전각이다.
이 밖에 문화재로는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쌍계사 부도와 쌍계사중건비명이 있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는 취봉당혜찬대사지도(翠峰堂慧燦大師之屠) 등 9기가 있는데, 대부분이 석종형(石鐘型)이고 옥개석이 있는 것도 있다. 또, 중건비는 자연석 기단 위에 장방형의 비신(碑身)이 있는데, 김낙증(金樂曾)이 찬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쓰고 김낙조(金樂祖)가 새긴 것이다.
3. 부안의 개암사
부안의 개암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묘련이 창건한 사찰을 말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4년(무왕 35)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76년(문무왕 16)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 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276년(충렬왕 2)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4년(태종 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 뒤, 1636년(인조 14)계호(戒浩)가, 1658년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승담(勝潭)이 중수하였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다. 이 가운데 부안 개암사 대웅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예전의 황금전이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이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또한,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한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유물로는 1689년(숙종 5)에 조성한 개암사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과 「중건사적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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