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님 _ 어원 자료
‘샌님'이란 단어는 이것과 연관된 속담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쓰임이 꽤나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룻이 석 자라도 먹어야 샌님"
"남산골샌 님은 뒤지하고 담뱃대만 들면 나막신을 신고도 동대문까지 간다."
"남산골 샌님이 망해도 걸음 걷는 보수는 남는다."
"죄는 막둥이가 짓고 벼락은 샌님이 맞는다."
등등이 그 예들인데, 이 속담 속의 ‘샌님'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수반되지만 가끔 긍정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남산골샌님'은 ‘남산골딸깍발이'나 ‘꽁생원'과 거의 동등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면서도 자존심만 강한 선비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 ‘활동력과 진취성이 없고 행동이나 성미가 고리삭은 남자를 흉하게 이르는 말(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이란 뜻풀이는 주로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부정을 모르고 강직하여 융통성이 없이 원칙만 고수하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볼 때에는 긍정적인 면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샌님'의 ‘님'은 ‘서방님, 도령님' 등의 ‘님'과 같은 접미사임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그 어기 ‘샌'은 무엇일까? 혹시 ‘샛서방의 ‘샛'이 ‘님'과 연결 되어 ‘샛님'이 되고 이것이 음운 동화를 일으켜 ‘샌님'이 되었다고 착각하 는 사람은 없을까? 그러나 이 ‘샌'은 엉뚱하게도 한자어의 준말이다. 즉 ‘생원(生員)님'이 줄어서 ‘샌님'이 된 것이다. ‘생원'이 줄어서 ‘샌'이 되고 그에 '님'이 붙은 것이 아니라 ‘생원님'이 줄어서 ‘샌님'이 된 것이다. ‘생원'이 란 단어 자체로는 ‘샌'으로 줄어들기 어렵다. 여기에 ‘님'이 연결될 때라야만 ‘샌님'이 될 수 있다. ‘김 생원'을‘김 샌'이라고는 하지 않듯이.
‘샌님'이 ‘생원님'의 준말이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1880년에 편찬된 「한불자뎐」에 ‘샌님'을 ‘상전주(上典主)'로 풀이하고 다시 그 뒤에 다시 ‘생원님'이란 풀이를 하고 있고, 조선 총독부의 「조선어사전」(1920)과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에도 ‘생원님'과 동일하다고 풀이하고 있으며,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이나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말대사전」에서도 모두 똑같이 ‘생원님'의 준말로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풀이는 옛 문헌에도 보인다. 예컨대 1843년(또는 1903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세대학교 소장본인 「속명유취(俗名類聚)」에 ‘생원주(生員主)'라는 표제어에 대하여 ‘샌임'으로 풀이하고 있어서, 사전에서의 풀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처럼 ‘생원님'이 ‘샌님'으로 줄어들 가능성 은 얼마든지 있다. 전에는 ‘쥐'를 ‘서생원(鼠生員)'이라고 하였는데, 그 발음이 대개는‘서새원'으로 들리곤 했다. 이화 작용에 의한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샌님'은 ‘싄님'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생원(生員)'의 한자음 이 ‘슁원'이었기에 ‘슁원님'의 준말도 ‘싄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싄님'은 문헌상으로는 19세기 말에 처음 보인다.
신님 上典主 싕원님<1880한불자전, 386>
남산골에 딸각발이 븍촌 싄님 차져가셔 셰쥬 삼배 먹은 후에 슈작하며 뭇난 말이 이 셰샹에 매랑 한 일 허다한 줄 알엇난가<1904대한매일신보, 2>
집집하다 밧갓 대문은 궤 구멍만하야 남산골 딸깍 싄님의 집 갓하야도<1908구마검, 2>
그렇다면 ‘싄님'으로 줄어들기 이전의 ‘싕원님'은 언제부터 보일까? ‘생원(生員)'이란 조선 시대에 소과(小科)인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 때의 숭보시(陞補試)를 이어받아 1389년에 원시(生員讖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니, 그때부터 ‘생원(生員)'이란 단어가 쓰였을 것이다. 생원은 진사(進士)와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결국 과거 시험에 응시할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生員(또는 ‘싕원')'은 한글 문헌에서는 15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오직 生員이 大學애셔 飮食하고 妻子는 울워러 사롤대 업사니 뎨 엇뎨 마사매 매요미 업스리잇가<1475내훈언해, 2, 110b>
生員 韓逑는 廣州 사라미라<1514속삼강행실도, 효, 7a>
놀甫가 쇽양터니 上典이라 아니하고 生員으로 부르것다<1918빅흥보가, 46a>
싕원 지븨 쥭 보내 거단 이제 생원 비져븨셔 홍창슈의 지븨 머디 아닌 법 인나니<1565순 천김씨언간>
미련한 홍생원은 자긔 안악 쟝씨의 말만 엇구수히 듯고 죠곰도 불안이 녁이지 안이하더라<1908홍도화, 상, 360>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을 낙구워 보았다. <1936모밀꽃필무렵, 295>
여기에 ‘-님'이 붙은 것이 ‘生員님, 싕원님, 생원님'이다.
여보시오 生員님 已往 作處한 일이니 쥬먼이 일홈이나 가라쳐 주욥소셔 <1918박흥보가, 46a>
거챵 됴후 싕원님 와 유무 드리신다<1636병자일기, 78>
그거시 갓한 사람이 아니라 싕원님이 거울에 빗최인 거시 아니오 하니 싕원님이 그제야 깨닷고 올치 올치 오라 하마트면 내가 초라 떼일번 햇지<1904대한매일신보, 3>
이즈음은 그날의 강직이 없어지시고 가난에 시달린 한 생원님같이 되시지 않았는가. <1933운현궁의봄, 215>
그런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싄님'이 ‘싕원님'과 동시에 쓰이고 있어서 흥미롭다. 지칭할 때에도 싕원님'과 ‘싄님'을 같은 자격으로 쓰고, 호칭으로 부를 때에도 ‘싕원님'과 ‘싄님'을 쓰고 있어서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사람을 낮추어 지칭할 때에는 ‘샌님'이란 단어를 쓰고, 직접 앞에서 부를 때에는 ‘생원님'을 쓸 것인데, 20세 기 초에는 그 반대로 부를 때나 지칭할 때나 ‘샌님'과 ‘생원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에구구 샌님 살녀줍시오 아무죄도 업는 소인 등을 웨 이리 하십닛가 생원님은 산골이 울니게 불호령을 하며 이놈 그게다 무슨말인구 앗가 홍찰의령감 편지를 보고 볼셔 아랏는대 네놈들이 발명을 하면 나가쇽을가 여보아라<1911치악산, 하50>
이놈 놀보야 네 집터니 옥여탄금형 이라 맨 먼져 박통의 나왓던 샌님이 상사가 나셔 강남 황졔 분부 뫼와 신이 어셔 밧비 집 뜨뜨라<1908홍보전, 27a>
「치악산」(1911)의 ‘에구구 샌님 살녀줍시오'란 예문은 ‘샌님'을 낮추어 이르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같으면 ‘에구구 생원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 해야지, 만약 '에구구 샌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가는 오히려 큰 코 칠 것이다. 「임거정」(1939)에 나타나는 예문을 보면 아이가 자기 집주인을 보고 ‘샌님'이라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집주인을 찾는 나그네도 집주인을 ‘샌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황천 왕동이가 삽작 박게서 주인을 차즈니 한참만에 아이놈 하나가 안에서 나오며 곳
“샌님 집에 안 기시요?"
하고 말하엿다.
“어듸 가섯느냐?"
"풀무꼴 잔치에 가섯소”
"풀무꼴이란 데가 예서 머냐 가까우냐?"
"풀무꼴이 여기서 가찹소"
"그럼 곳 오시겟구나?"
"저녁 전에 오시겟지요"
"얘 너의 댁 샌님이 어듸서 데려오신 사람이 잇지?"
"샌님이 데려온 사람이 누구요?"
“너만한 아이 하나하구 그애 아버지하구 데려오섯지?"
"난 몰라요"
"너는 못 봣느냐?"
"난 몰라요"
"모르거든 고만둬라 잇다가 너의 샌님 보이러 다시 오마'<1939임거정, 417>
주인이 아직도 오지 아니하야그집 아페서 오락가락 하는데 먼저 보던 아이눔이 어듸를 다 오면서
"여보시요 나좀 보시오"
하고 소리를 질럿다.
"나를 불럿느냐?'
"녜 샌님이 풀무꼴서 자구 오시기가 쉽답듸다 여기서 기다리지 말 구 갓다가 내일 아침에 오시우" "풀무꼴서 사람이 왓느냐?"
"샌님하구 가치 갓던 냥반이 한 분 오섯습듸다”<1939임거정, 417>
그래서 1930년대만 해도 ‘샌님'을 ‘생원님'을 낮추어 부르거나 놀림조로 부르는 말이 아니었다. 다음에 드는 「임거정」의 예문을 보면 ‘박샌님, 김샌님, 이샌님' 등으로 지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박 생원님, 김 생원님, 이 생원님' 등과 동일한 의미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를 때에 ‘샌님'을 쓰지 않은 시대는 20세기 중반으로 보인다.
"안될 것 업소 아들 업는 박샌님이 하필 박샌님이라구 할꺼잇나 김샌님이나 이샌님이라구 하지 하여튼지 진위나 용인사는 어떤 샌님이 큰 따님 자근 따님을 데리구 장단이나 풍덕서 사는 형님의 한갑이나 진갑을 보러 간다구 하면 중노에 거침이 업슬꺼요"하고 서림이가 웃으니 여러 두령중에 이사람 저사람이
"됏거니”
"꾸며대는 말이 참말갓소"
"박서방이 샌님 노릇을 잘할까"
"천생 샌님이든데 샌님 노릇을 못하겟나”
하고 짓거리며 다들 가치 웃엇다.<1939임거정, 582>
음운 변화가 일어나 ‘생원님'이 ‘샌님'이 되고 난 뒤에 한동안 ‘생원님'이나 ‘샌님'이나 같은 뜻으로 쓰이다가 20세기 중반에 와서 그 뜻이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샌님'은 주로 ‘고리탑탑한 샌님, 남산골 샌님, 고리삭은 샌님, 남산골 딸깍샌님' 등으로 쓰이지만, ‘생원(님)'은 매우 다양하다. ‘샌님' 은 대개 ‘남산골 샌님'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생원'은 그렇지 않다. 즉 ‘광주(光州) 생원(生員) 첫 서울', ‘글에 미친 송 생원(生員)', ‘까다롭기는 옹생원 똥구멍이라', ‘최 생원(生員)의 신주(神主) 마르듯', ‘홍(洪) 생원네 흙질하듯' 등처럼 다양하게 쓰이는데 주로 구체적인 수식어를 동반하고 있다.
그 고리탑탑한 샌님이 단박에 놀아나고<1932흙2, 230>
남산골 샌님처럼 도사리고 앉아 있던 사림들도 얼굴이 붉어지고<1933영원의미소, 170>
그저 샌님두 아니구 고리삭은 샌님이여<1939임거정, 566>
집집 마다 밧갓 대문은 궤 구멍만하야 남산골 딸깍샌님의 집 갓하야도<1908구마검, 2>
그렇다면 ‘남산골 샌님'이나 ‘남산골 딸깍샌님'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까? 1904년에 나온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에는 ‘남산골 딸각샌님'의 심사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엇더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팔구셰 된 아희가 넙젹한 숑긔떡을 사 가지고 가난 것을 보고 대단히 먹고 십흔욕심이 나셔 한 계교를 생각 하고 그 아희다려 하난 말이 이 아희야 그 떡으로 오봉산을 만드러 주랴 한대 그 아희가 신긔히 알고 그리하여 줍소 하거날 그 사람이 입으로 이모뎌모 다 갈가먹고 다섯봉이 지게 하여 준즉 그 아희가 대단히 됴화하난지라 그 사람이 더 빼앗셔 먹고 십허 그 아희다려 이번에난 그 떡으로 목지를 만드러 주랴 한즉 그 아희가 또 됴화하거늘 그 사람이 그 오봉산을 다 훌쳐 먹고 동구랏커 만드러 준즉 그 아희가됴화셔 먹지 아니하고 가지고 놀새 그 사람이 그 떡을 마져 먹고 십허셔 아희다려 왈 네가 그 목지를 가졋스니 땅에 던져 돈치는 형상을 내라 한대 그 아희가 그 말대로 수삼차 형샹을 낸즉 그 사람이 그 목지를 집어가지고 가면서 하난 말이 네가 돈을 다 쳣스니 목지난 임쟈가 가지노라 하고 가더라 이거슨 남산골 딸깍발이 샌님의 심사니라<1904대한매일신보, 3>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구체적인 인물을 2인칭으로 호칭할 때에는 ‘생원(님)'이지만, ‘생원님'을 싸잡아 보편적으로 좋지 않게 3인칭으로 언급할 때에는 ‘샌님'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생원님'은 ‘쌩원님'이 되지 않지만, ‘샌님'은 ‘쌘님'이라고 하여 그 부정적 의미를 더 강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어느 어휘가 어원은 동일하지만, 음운변화를 겪은 형태와 그 이전의 형태와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어휘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조선시대 남산 기슭에 생원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곳에 사는 생원을 ‘남산골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샌님은 생원님이 변한 말이고, 딸깍발이는 가난한 생원이 화창한 날에도 비 오는 날 신는 나막신을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다녀 붙은 별명이다.
그럼 왜 맑게 갠 날에도 남산 생원은 나막신을 신었을까? 지금 충무로 전 중국대사관 뒤에서 세종호텔 뒷길로 이어지는 길에 야트막한 고개가 있었다. 그 이름이 '진고개'이다. 비가 오면 남산 토사가 쓸려 내려와 땅이 무척 질었다. 오죽하면 한자로 진흙 니(泥), 고개 현(峴)을 써서 이곳을 '이현'이라고도 불렀겠는가. 그래서 이곳에 사람들의 필수품은 비 올 때 신던 굽이 높이 달린 나막신이었다.
생활이 넉넉지 못한 생원은 짚신을 따로 살 형편이 못 되어 맑은 날도 그냥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당시 남산골 생원의 모습은 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에도 등장한다. 의복과 행색은 볼품없었어도 고지식하면서도 기개만은 꼿꼿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일본 사람들은 경치 좋은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생활의 편리를 위해 미츠코시 백화점(신세계 백화점)과 조선은행(한국은행 본관 사적 280호)을 세웠다. 남산 아래 명치정1정목(명동)과 본정통(충무로)에도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상권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남산순환버스를 타고 정상에 다다르면 팔각정과 봉수대가 있다. 봉수대는 평화 시에 1홰(봉수 신호)에 불을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홰, 국경에 접근하면 3홰, 국경을 넘으면 4홰, 접전이 시작되면 5홰에 횃불이 비친다.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통신 강국이 아니었을까'하는 상상해 본다.
손꼽히는 서울의 명소 'N서울타워'와 함께 늘 푸른 소나무, 철 따라 낭아초, 산수유, 밥태기 나무, 벚나무, 쉬땅나무 등이 살아 숨쉬는 도심 속 쉼터 남산, 이 산이 서울에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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