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주_윗사람이 마시는 술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개강 모임이나 종강 모임이 무척 낯설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 교수님께서 직접 참여하시는 일 또한 거의 없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인 1990년대만 하더라도 개강 모임과 종강 모임에 반드시 교수님이 참여하셔야 한다. 만일 교수님이 한 분도 참석지 않으시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집행부 임원들은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교수님들이 학생에게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 개강 모임과 종강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들은 개강하거나 종강을 할 때면 으레 교수님을 저녁 자리에 초대해야만 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하고 자리에 정당성을 부여 받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도 교수님이 적어도 한 분은 계셔야 했다. 교수님께서 과대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면 먼저 와 있던 학생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우리 때의 낭만이었다.
그런 자리에는 음식과 더불어 늘 술이 준비되기 마련이다. 교수님 모신 자리라고 조심하면서 술을 따르곤 했다.
"선생님, 제가 약주 한 잔 올리겠습니다."
라고 그럴 듯하게 예를 갖추는 예비역 복학생도 있는가 하면,
"술 한 잔 하세요."
하며 건방을 떠는 재학생도 있었다
간혹 술 몇 잔에 호기가 지나쳐 사고를 치는 학생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때 교수님들께서는 술 때문에 그러려니 하다가도 지나치다 싶으면 호통을 치시기도 하고, 또 한 때 쥐어 박기도 하셨다. 그러면서 술에 대해서 주도(酒道)에 대해서 배웠다.
모임 다음 날이면 으레 교수님께서 그 전날 모임에 대해 심각하게 훈계를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날의 치기 정도로 생각될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훈계의 내용은 대부분 예의범절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어른에게는 '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약주(藥酒)'라는 말을 쓴다거나, '집'이라는 말 대신 '댁[宅]'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는 것들이다. 대학생이 그런 것도 모르냐는 식의 몰아붙임이었지만 그게 정말 산 교육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도 물론 철없던 시절 무던히도 고집피우며 교수님들을 괴롭혔던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송할 뿐이다.
그렇게 호통치시고 술자리에서 한 대 쥐어박기까지 하시고서는 학생을 따로 불러 세상 자애롭게 타일러 주시고 미안한 마음까지 담뿍 담아 전해주셨다.
"이 친구야, 그래도 내가 명색이 교수인데, 교수 앞에서 그렇게 하면 되겠나? 너에게 손을 댄 것은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야. 오해하지 말게"
와 같은 식이었다. 그러면 바로 무릎 꿇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한번은 대학교 1학년 첫 학기 교양 필수인 대학국어 시간에 '유서'쓰는 것이 필수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지, 어떻게 뜨겁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시고 싶은 의미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기억난다. 그 때 우리 학번에 무려 5대 독자가 한 명 있었다. 경상도 상주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 깡촌에서 올라온 녀석인데, 아무 생각없이 유서를 썼고, 또 으레 1학기 여름방학 때 성적표와 함께 요서를 동봉해서 보냈다. 취지를 적어 놓은 종이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난리가 난 것이다. 5대 독자의 대학 첫 성적도 형편없이 놀랍거니와 유서와 함께 동봉되어온 편지를 받으니 난리가 날만도 했다. 하필 그 녀석은 여름농활로 논산에서 더 들어가는 깡촌 쯤에서 수박을 열심히 따고 있었다고 하니. 연락이 될 리가 없었으니 일이 더욱 커진 것이다. 온 집안 어른들이 총 출동하여 무려 30여 분이 대학 본부로 쳐 들어오셨던 일이 있었다. 물론 자세한 사정을 학과장님께서 빌다시피 하여 노여움을 거두기는 했지만 전설로 남는 이야기다.
암튼 요사이는 대학에 그런 문화 자체가 없어졌다. 학생들이 살갑게 교수님에게 다가가지도, 교수님이 학부 학생들에 가까이 가기도 어렵다. 일단 학생들이 교수를 우리 때와 달리 그렇게 어렵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스스럼없이 지내려고 한다. 그러니 술을 권할 때
"약주 한 잔 올리겠습니다."
와 같은 높임말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다. 특이하게도 요즘 학생들은 술을 같이 들자고 수시로 잔을 부딪친다. 이른바 '쨍'을 하고 얼른 마시자는 것이다. 얼떨껼에 따라 마시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뒷맛이 씁쓸하다.
약주
약주는 술밑을 여과하여 만든 맑은 술이다. 원래는 약효가 있다고 인정되는 술이나 약재를 넣고 빚은 술을 뜻했다. 후대로 오면서 맑은 술을 뜻하거나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그 의미가 변천되었다. 약주는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주로 서울 부근의 중류 계급 이상에서 소비하였다. 멥쌀과 누룩으로 밑술을 담그고 그 위에 찹쌀을 쪄서 덧술하여 만든다. 고전 의서에는 약주를 온주, 무회주, 난주 등으로 부르고 있고 등주라고도 하였다. 약주는 고려 시대 이래 가장 애용되어 온 백하주부터 절 주변에서 빚었다는 법주 등이 있다.
원래 약주라는 것은 약효가 있다고 인정되는 종류의 술이거나 처음부터 약재를 넣고 빚은 술을 뜻한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맑은 술을 뜻하거나 또는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그 의미가 변천되었다. 약주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조선시대 때 가뭄으로 인하여 먹을 곡식이 부족해지자 여러 번 금주령을 내렸다. 그런데 특권계급이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려는 핑계로 약으로 술을 마신다고 약주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점잖은 사람이 마시는 술은 모두 약주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잇다.
또 다른 설이 있다. 선조 때에 문신 서성(徐渻)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임원경제지』에서도 “서충숙공이 좋은 청주를 빚었는데 그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집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약산춘이 약주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약주는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주로 서울 부근의 중류이상 계급에서 소비하였다. 멥쌀과 누룩으로 밑술을 담그고 그 위에 찹쌀을 쪄서 덧술하여 만든다. 각 가정에는 술에다 인삼이나 그 밖의 약재를 넣어 약주를 빚는 그들만의 비법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집 술을 자랑으로 여겼다.
약주의 한 처방을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멥쌀 2되 반을 잘 씻고 가루 내어 백설기로 찌거나, 솥에 물을 일곱 사발만 끓여 가루를 넣고 익으면 골고루 저어 퍼낸다. 하룻밤 재워 식힌 다음, 좋은 누룩가루 반 되를 넣어 골고루 버무린 뒤에, 항아리에 넣고 봉해둔다. 날씨가 차면 방에 두고 새끼로 똬리를 만들어 괴고 거적을 둘러친다. 날씨가 더우면 그냥 밖에 둔다. 술이 맑게 고이면 찹쌀 5되를 잘 씻어 찐 다음에 물 한 사발만 붓고 하룻밤 식힌다. 냉수 일곱 사발에 찐 찰밥과 밑술을 혼합하여 짚불을 쐰 항아리에 넣고 봉하여 2일 후에 걸러 마신다.
약주에 속하는 술은 매우 많다. 우리나라의 고전의서에는 약주를 온주(溫酒) · 무회주(無灰酒) · 난주(煖酒) 등으로 부르고 있고 등주(燈酒)라고도 하였다.
약주에 속하는 술로는 백하주(白霞酒) · 향온주(香醞酒) · 녹파주(綠波酒) · 벽향주(碧香酒) · 유하주(流霞酒) · 소국주(小麴酒) · 부의주(浮蟻酒) · 하향주(荷香酒) · 죽엽주(竹葉酒) · 별주(別酒) · 황금주(黃金酒) · 동양주(東陽酒) · 절주(絶酒) · 행화춘주(杏花春酒) · 청명주(淸明酒) · 법주(法酒) 등이 있다.
① 백하주: 고려시대 이래 가장 애용되어온 술이다. 흰 아지랑이와 같다 하여 백하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주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약주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였다.
② 녹파주: 고려 이후부터 알려진 술이다. 푸른 파도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경면녹파주(鏡面綠波酒)라는 낭만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다.
③ 벽향주: 조선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나 있던 술이다. 푸르고 향기로운 술이라는 뜻이다.
④ 소국주: 조선 초기부터 많이 알려진 술이다. 우리 나라 술을 대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술맛이 뛰어나다. 특히 다른 술과는 누룩의 처리 방법이 다른 특이한 술이다. 이 소국주를 사람에 따라서는 청주라고 하고 탁주라고 하기도 한다. 원래 우리 나라의 탁주와 청주는 구별이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는 같은 원료를 가지고 맑은 청주를 빚을 수도 있고 탁한 탁주를 빚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⑤ 하향주: 조선 초기에 많이 유행한 술이다. 빚어진 술이 연꽃 향기와 같다고 비유된 술이다.
⑥ 부의주: 고려 이후에 알려진 술이다. 이른바 동동주에 해당하는 술이다. 맑은 술에 밥알이 동동 뜬 것이 마치 개미가 물에 떠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아주(浮蛾酒) 또는 녹의주(綠蟻酒)라는 별명도 있다.
⑦ 청명주: 조선 중엽 이후부터 말기의 문헌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말기에 유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춘분에서 15일째 되는 청명날에 빚는 계절적인 술이었다.
⑧ 법주: 언제 어떻게 이름이 붙여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절간 주변에서 빚어지고 있는 술을 모두 법주라고 불러 왔다. 그 중에서도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법주가 특히 유명하였다. 보통 약주와는 달리 진하고 맛있게 여러 번 빚은 술을 말한다. 흔히 춘주(春酒)라고 하며 한문표기로는 내(耐)라고 한다. 보통 약주는 밑술을 담그고 한번 덧술하는 이른바 2차담금을 한다. 이에 비하여 춘주에 속하는 술은 세번으로 나누어 3차담금을 하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술맛도 좋고 일반 약주보다 더 맑다. 봄 ‘춘(春)’자를 술 이름으로 삼은 것은 당나라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 중국 · 일본 등지에서는 관습적으로 고급 약주류에 ‘춘’자를 붙이고 있다. 따라서, ‘춘’자가 붙는 술은 모두 이 종류의 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 관례에 따라 붙여지기도 한다.
고려 때부터 이 종류의 술이 알려졌으며 기록에도 남아 있다. 춘주에 속하는 술로는 호산춘(壺山春) · 약산춘(藥山春) · 이산춘(尼山春) · 잡곡주(雜穀酒) · 삼오주(三午酒) · 삼해주(三亥酒) · 벽향춘(碧香春) · 사마주(四馬酒) · 일년주(一年酒) 등이 있다.
① 호산춘: 전라도 여산(礪山)의 특산주이다. 여산의 별명이 호산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중엽 이후에 선을 보인 술이다.
② 약산춘: 서울의 약현에 살던 서씨가(徐氏家)에서 잘 빚던 술로서 서울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③ 삼해주: 정월 첫 해일(돼지날)에 담가서 버들개지가 날릴 때쯤 먹는다 하여 유서주(柳絮酒)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월의 해일을 골라 돼지 날마다 세 번에 걸쳐 빚는다 하여 삼해주라 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 이후 가장 보편화된 술의 하나이다. 호산춘 · 약산춘 · 회산춘 등과 같이 춘자를 붙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번에 걸쳐 담그는 양조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춘주에 해당하는 술임에는 틀림없다.
④ 삼오주: 정월에 담그는 술로서 오일(말날)만을 거듭 세 번 잇달아서 빚는 술이라고 해서 삼오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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