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아파트 붕괴_빨리빨리가 만든 비극

사진 속의 5층짜리 아파트 두 개 동 사이의 휑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아파트가 붕괴하는 바람에 아래에 있던 집들을 덮친 것이다. 그런데 자시히 살펴보면 아파트가 무너진 자리에는 뼈대 하나 남아 있지 않고, 과자 부스러기 처럼 폭삭 무너진 채 쓰러져 있다. 오른쪽 아프트 정면에는 시민 아파트라고 쓰여 있다. 시민 아파트를 어떻게 지었길래 뼈대도 없이 폭삭 무너져 내린 걸까?
1960년대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농민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거주할 주택 상황은 열악하였다. 이에 도시에는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주택이 빠르게 늘어났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별명이 불도저였을 만큼 자신이 세운 계획을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현재의 성남시)에 대단지를 조성해 이주시키고, 서울에 2,000개 동의 시민 아파트를 공급해 9만 가구를 입주시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시민 아파트를 서울시에서 지어 주면 시민들이 입주해 살면서 일정 금액을 갚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사업은 서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환영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당시 3선 개헌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앞두고 정치적 전시 효과를 얻기 위한 정책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문제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시민 아파트를 건립하려는 서울시장의 의욕이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건설할 가구 수를 높게 잡아 한 건물당 투입되는 건축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건설업체의 부패까지 겹쳐 실제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턱없이 낮아졌다. 결국 건설 과정에서 건물 기둥에 들어갈 철근을 줄이거나, 건물을 단단하게 하는 시멘트를 거의 섞지 않는 등 날림 공사가 진행되었다. 와우 아파트도 그렇게 만든 시민 아파트 중 하나였다.
게다가 와우 아파트는 1969년 6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6개월 안으로 공사를 마치기 위해 바닥을 다지는 기초 공사 없이 맨땅에 5층짜리 아파트를 세운 부실 공사였다. 겨울에는 땅이 얼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봄이 되어 언 땅이 녹으면서 기둥이 하중을 이겨 내지 못해 아파트가 붕괴하였다. 와우 아파트는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차례대로 철거되었고, 현재 이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되었다.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은 박정희식 성장 만능주의, 졸속 행정의 표본으로 비판받는 한편, 아파트 건설을 포함하여 도시 재생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지금까지 던져 주고 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臥牛apartment 崩壞 事故
정의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경, 마포구 창전동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한 개동(제15동)이 붕괴하여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
개설
와우아파트는 서울시의 고민이었던 무허가 건물을 줄이고, 그 대신 서민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취지 하에 건립된 아파트였다. 즉 와우아파트는 무허가 건물을 줄여나가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서민아파트 건설 계획의 하나였던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한국사회의 전시행정, 부정부패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고였다. 건설사의 비리와 감독기관의 비리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너무 빠른 시간에, 충분하지 않은 예산으로, 그리고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의 합작에 의한, 이미 예고되어 있는 사고였다.
역사적 배경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로 무허가 주택이 난립하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서울시는 서민용 아파트를 지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족한 예산에 부족한 공사 기간, 건설사의 부실 공사, 붕괴위험 신고를 받고서도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한 구청 등이 서로 맞물리며 빚어낸 사고였다.
경과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에 착공하여 1969년 12월에 완공되었으므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4개월만인 1970년 4월에 붕괴되었다. 서울시가 책정한 건축 비용의 절반도 안 되는 비용으로 건설사는 아파트 건설을 시작하였다. 사고 이후 작성된 사건경위 보고서에 의하면, 철근이 70개 정도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5개만 사용하였고 시멘트의 사용량은 턱없이 부족하였다고 한다.
결과
와우아파트붕괴사고는 한국 부실공사를 대표하는 사고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울시장 김현옥, 구청장,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사 사장 등이 구속되거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의의와 평가
애초 서울시에 무허가 주택을 없애고 서민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은 도시계획 측면에서나 서민생활 측면에서나 훌륭했지만 그 실행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턱없이 부족한 공사비용, 짧은 공사기간,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 등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한국의 졸속 행정과 부정부패의 결합에 의한 대형 사고였다. 이 사고는 향후 아파트 건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강화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와우아파트 붕괴...시대가 낳은 참사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인 1970년 4월 8일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있던 와우시민아파트 1개 동이 무너져 내렸다. 사고로 34명이 사망했고 40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준공 4개월 만에 일어난 참사로 졸속행정과 부실시공이 원인이었다. 와우아파트 붕괴 이후 국내에선 건축물 안전진단이 대폭 강화됐고 이후 등장한 시범아파트가 국내 아파트 건축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는 부실시공에 따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는 이촌향도(離村向道)가 극에 달했던 시기다. 전국 각지에서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판자촌으로 대표되는 무허가 건축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판자촌 난립에 따른 주거 불안은 정부 차원에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불도저 시장’으로 세간에 기억되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에게 무허가 건축물 정리 지시를 내렸고 김 시장의 전시 행정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를 초래했다.

대통령 지시 직후 서울시는 무허가 건축물 전수조사를 시행해 법 위반 건축물 13만 6000여 동을 확인, 이 중 4만 6000여 동은 개량을 통해 양성화시키고 나머지는 철거키로 했다.
철거민에 대한 이주대책도 함께 마련됐는데 시민아파트 2000동 건축 및 광주(현 성남) 대단지로 10만 명 이주계획이 그것이다.
계획은 빠르게 진행됐다. 1968년 6월 첫 시민아파트인 금화시민아파트가 착공에 들어갔고 1970년까지 시민아파트 447동이 건립됐다. 이주를 위한 정책 편의도 마련됐다. 빈민층 이주 목적의 주택이다 보니 시민아파트 입주자는 최초 계약금 납부 후 최장 15년까지 잔금을 분할 납부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민아파트는 변화하는 서울의 상징이자 김현옥 시장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포장됐으나 실상은 문제투성이였다.
일단 건축에 책정된 예산 자체가 너무 적었고, 단지별 시공 기간도 6개월에 불과했다.
공사는 대형사가 아닌 30여 중소업체가 도맡았는데 이들이 하청을 주다 보니 그러잖아도 적었던 예산은 더욱 줄었다.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업체에선 골조공사만 마무리하고 손을 뗐는 경우가 많았고 내부공사는 입주민이 책임지기 일쑤였다.
아파트 품질 또한 형편없었다. 전용면적 11평(36㎡)대 소형인 시민아파트는 단열·방음에 취약했다. 초기 모델의 경우 세면장과 화장실을 층당 공동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아파트 대부분이 산 중턱에 건설되다 보니 상수도 수압이 약해 밤에 고무통에 물을 받아 낮에 퍼서 쓰는 경우가 허다했다.
안전의 핵심인 내력 구조도 문제였다. 건물 하중을 내력벽이 지탱하는 게 아닌 기둥과 보, 슬래브를 통해 분산 지탱했다.
부실로 인한 사건 사고도 비일비재했다. 겨울철이면 갈라진 벽과 바닥 틈 사이로 연탄가스가 새어 나왔고, 담벼락이 무너져 인명사고가 발생하거나 배관이 뒤틀려 아랫집으로 화장실 오물이 세기도 했다.
시민아파트는 판자촌 거주 빈곤층을 위한다는 건설 취지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정부가 판매한 입주권 자체는 싸게 책정됐으나 해당 거래에 브로커가 개입하며 입주권 가격이 폭등, 이른바 ‘딱지’ 거래가 횡행했고 이에 딱지를 판 극빈층은 서울 근교 더 싼 집으로 떠나고 중산층 상당수가 시민아파트에 입주하게 됐다.
중산층 입주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했다. 당시 정부는 빈민층 생활 수준을 고려 1㎡당 270kg을 견딜 수 있도록 아파트를 설계했는데, 실제로는 중산층들이 주로 입주하게 되며 건물이 받게 된 하중은 예상치의 3배를 쉽게 초과했다.

무너질 수밖에 없던 와우아파트
시민아파트 계획 자체가 문제투성이였는데 그중에서도 이제 막 지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내린 것은 이 건물이 온갖 부실시공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와우시민아파트는 5층 규모 총 19동이 지어졌다. 이 중 13동에서 16동까지를 대룡건설이 담당했는데 대룡은 이를 무면허 토건업자인 박영배에게 하도급을 줬다.
대룡이 정부에서 받기로 한 공사비는 동당 1100만원이었고 하청 과정에서 공사비 125만원이 뜯겼다. 박영배는 요즘 기준으로 10억원도 되지 않는 돈으로 5층 아파트를 지어야 했다.
공사는 당연히 날림으로 진행됐다. 기둥에 들어가야 할 철근 수는 기본 설계의 1/10 수준으로 줄었고, 콘크리트 강도도 기준치에 크게 못 미쳤다.
특히 짧은 공기 탓에 건축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지반공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박영배가 지은 아파트는 1969년 12월 입주를 시작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봄이 되며 녹자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붕괴된 15동에는 당초 30세대가 입주할 예정이었는데 사고 당시 그 절반만 입주한 상태다 보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붕괴 직후 원인 조사에서도 부실 자재 사용이 핵심 원인으로 지목됐다.
50년 흘렀지만 여전한 부실시공
15동 붕괴 후 박영배가 지은 나머지 3개 동도 부실이 확인돼 철거됐다. 사고 책임을 지고 김현옥 시장이 경질됐고 박영배는 구속됐다.
정부는 당시까지 완공된 시민아파트에 대한 안전검사도 진행했는데, 총 434개 동 중 349개 동의 부실이 확인돼 보수 및 철거 작업이 1977년까지 진행됐다. 시민아파트 추가 건설계획도 전면 폐기됐다.
이후 정부의 도시민 주거 계획도 전면 수정됐다.
빈민층 대상이 아닌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 공급을 늘리기로 한 것으로 그렇게 탄생한 것이 시민아파트 대비 안전성 및 주거 편의성이 크게 향상된 시범아파트였다. 그리고 이는 현대 대한민국 아파트의 전형이 됐다.
다만 사고 이후로도 꾸준히 국내에선 말되 되지 않을 부실시공 사고가 이어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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