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와 라디오의 출발_1960년대부터

우리는 언제부터 TV와 라디오 방송을 보고들을 수 있었을까? 국내에서 TV 방송은 1956년 DBC(대한방송) 개국이 시초였고, 1961년 국영 방송인 KBS(한국 방송 공사)가 개국하면서 본겨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964년 민영 방송인 DTV(1966년 TBC로 사명 변경), 1969년 MBC(문화 방송)가 각각 개국하였다.
TV 방송이 본격화하면서 TV 수요가 늘어나자 1966년 금성사는 일본의 히다치사와 제휴해 국내 최초로 19인치 TV를 만들었다. 'VD-191'이라는 이름의 이 제품은 네 개의 긴 다리가 있었다. 이후 등장한 대부분 TV는 한동안 보관용 상자에 넣어져 나와 시청하지 않을 때는 미닫이문을 닫아둘 수 있었다. 1970년대 이전 TV는 진공관을 부품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진공관이 한참 동안 예열된 후에야 영상이 나왔다. TV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 가격은 6만 8천 원으로, 당시 생산직 노동자의 1년 수입과 맞먹는 가격이었다.
1970~80년대 학교에서 가정 환겨을 조사할 때는 집에 TV가 있는지도 물었다. TV는 그 집의 생활 수준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결혼할 때 신부의 필수 혼수품이 된 TV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보편화되었다. 이후 컬러 TV도 등장하면서 시각적 화려함과 함께 의상, 화장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TV는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날이 저물면 도시에서는 가족끼리 대화하거나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농촌에서는 저녁을 먹고 이웃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는 마실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TV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브라운관에 눈을 빼앗겼다. TV가 별로 없던 농촌에서는 대청마루 마당에서 TV를 옮겨 놓고 마을 사람들이 같이 시청하였다. 당시 TV가 있는 집 아이는 친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여로>로 대표되는 TV드라마는 저녁 식사 시간과 비슷하게 방송되었다. 축구 국가 대표팀 경기나 프로 복싱 경기가 있는 날에는 많은 회사원이 귀가를 서둘렀다. 요즘은 큰 경기나 행사가 있을 때만 여러 사람이 모여 응원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1970년대에는 스포츠 경기는 물론 드라마도 함께 시청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면 라디오는 어땠을까? 한국에서는 1927년 경성 방송국이 생기면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때 당시는 일본어와 한국어 이중 방송을 하였다.
라디오 역시 초기에는 고가여서 부유층만 소유할 수 있었지만, 빠르게 일반 대중에 보급되었다. 라디오 방송은 늦은 밤 들을 수 있는 사연과 노래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취향 덕에 TV가 있었음에도 인기를 누렸다. 라디오는 전파를 수신해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군사 정권 시기에는 밤늦게 이불을 쓰고 라디오를 드는 사람을 간첩으로 신고하기도 하였다.
TV 시대 개막

이것이 서울이다(19) - 라디오·TV
지금 서울에는 36만5천9백대의 라디오와 5만6천대의 TV가 있다. 시청률은 라디오가 1백46만명으로 라디오 한 대에 3명씩이 매달려 듣고 있는 셈이며, TV의 시청자는 22만명으로 TV 한 대에 4명이 매달려 보고 있다. 지금 라디오와 TV는 문화의 매개체로 서울시민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최고도로 이용하고 있다.
(중략)
서울에서 TV가 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61년 12월 31일 KBS TV가 탄생해서부터이다. (중략) 상업방송국은 MBC에 이어, 동아방송국이 생겼고, 곧 이어 동양방송국이 생겨나 우리나라 상업방송의 개화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동양TV가 다시 발족하게 되어 서울에는 관영방송 KBS와 상업방송 4개소, TV 2개소가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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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방송국이 2개소나 되나, 시청자는 일정한 범위내로 국한되어있어 정부는 금성사로 하여금 일제조립식 TV수상기를 월부판매토록 했고 그후 계속 TV는 국내생산이 장려되어가고 있어 날로 TV대수는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요즘 TV나 라디오가 상업방송국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광고에 치우쳐 청취자나 시청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중략)
우리나라는 얼마 안 되는 라디오·TV일망정 골고루 보급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서울에만 집중되어있는데 서울이 점하고 있는 비율은 라디오가 전국의 18%, TV가 전국의 87%로 TV는 서울 일색이라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매일경제』, 1967년 9월 8일, 「이것이 서울이다(19) - 라디오·TV」
텔레비전의 격조 - 그 면목일신을 위한 분발을 바란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어 있는 매스컴이란 말로 포괄되는 대중전달수단 가운데서도 텔레비전만큼 시민생활과 직결되어있는 매체도 드물 것이다. 그 영향폭이나 깊이에 비기면 텔레비전이 대중문화의 전도체이자 사회교육면에서 중요한 지도성을 지녔다는 그 기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갈수록 저조해가는 요즘의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에서 그야말로 시청각으로 실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텔레비전 방영의 역사도 이제 10여 년을 넘기고 보면 그 기술면은 말할 것도 없이 편성면에서 무엇인가 성격과 개성이 정립되어도 좋을만한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현실은 이 기대를 송두리째 저버리고 있는 느낌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격조는 떨어져만 가는 한편이요, 편성과 기획에 있어서 대중을 향도하는 모럴이 있는가를 의심할 정도다.
(중략)
우선 흔히 보여주는 시대극이나 궁중극에서 하필이면 시기와 모략과 암투가 얽혀있는 당파싸움을 그려서 시청자로 하여금 암담한 심기에 빠지도록 할 것은 무엇인가. 작가나 제작가의 의도는 우리 민족의 그런 불행한 일면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있었다고 할지는 모르나 일반 청중에 있어서 과연 그 의도가 전달될 것인지, 아니면 단편적인 장면에만 흡수되는 역기능이 더 크지 않은지 신중히 생각해봄직 하다.
(중략)
이것은 필시 원작이나 각본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기획이나 연출에도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작이라면 코미디의 스크립터도 어지간히 빈곤하다. 각국마다 나오는 코미디가 거의 예외 없이 도둑질이나 사기같은 모티브나 싸움판을 방불케하는 거칠은 대사와 몸짓으로만 종시하면서 억지웃음을 강요하고 있는 데는 여간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략)
여기서 낱낱이 텔레비전의 프로를 비평할 겨를은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덧붙여 당부해두고 싶은 것은 대담프로에 출연하는 사회인사들이 주제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를 하고 나가달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지만 개중에는 상식선에도 이르지 못하는 발언이 지도적 위치에서 예사로 내뱉어짐을 보고는 이쪽이 도리여 진땀이 흐르는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아무쪼록 텔레비전방송은 우리 사회 교양을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는 대중문화 전파의 중심체라는 사명감아래 그 면목일신에 분발해주기를 절망할 뿐이다.
『조선일보』, 1974년 9월 6일, 「사설 : 텔레비전의 격조 -그 면목일신을 위한 분발을 바란다
위 자료는 TV와 라디오의 대중적 보급으로 변화된 문화상을 정리한 신문의 사설이다.
해방 직후 10만여 대도 안 되던 라디오는 1965년에 125만 대로 늘어나 1960년대까지 대중문화를 선도했다. 1964년에 3만여 대에 불과하던 텔레비전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75년에는 180만 대, 1980년대에는 690만 대로 늘어났다. 물론 1번째 신문 사설의 내용처럼 초기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확산은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텔레비전 방송은 TV 수상기가 널리 보급되고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대중문화 선도자로 등장하였다. 텔레비전이 ‘안방극장’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데는 드라마의 성공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드라마 방영 시간이 되면 가사를 팽개칠 만큼 텔레비전은 여성의 일상을 바꾸는 위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텔레비전 방송은 과도한 시청률 경쟁, 상업주의, 무분별한 외래문화 모방, 지나친 오락성 추구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주시정차 층인 여성-주부와 어린이를 향해 텔레비전을 보면 바보가 된다고 경고했다. 2번째 신문 사설도 텔레비전 방송이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등 격조가 떨어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정부는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편성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총리와의 대화’, ‘정부와의 대화’ 같은 정부 홍보정책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목적극’이라는 반공·경제성장 드라마를 제작하여 극화된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반공의식이나 성장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반공반북 선전 내용을 담은 장편 연속극, 각종 실화나 비화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예를 들어 KBS 라디오에서는 김삿갓이 북한을 여행하며 북한의 실상을 비판한다는 가상 설정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 방랑기’를 매일 5분씩 내보냈다. 중앙정보부는 이 프로그램에 직접 자료를 공급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드라마나 영화 등의 미디에서 실화 소재 이야기의 다수는 간첩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간첩 관련 드라마나 영화는 대개 실화이거나 실화처럼 보이도록 홍보되었다.
라디오는 텔레비전에 비해 편성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심야 라디오 방송이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방송국에서는 리퀘스트 형식을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리퀘스트는 청취자가 곡을 신청하면 방송국에서 해당 곡을 틀어주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라디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1978년 심야 방송에서 리퀘스트가 전면 금지됐다. 또한 AM 라디오에서는 팝송이 완전히 퇴출되었다. 이처럼 정부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인기를 누리던 음악과 코미디 등 대중문화 프로그램에 강력한 통제를 가했다.
자유와 규율 사이, 방송의 길을 찾다_텔레비전 방송
20세기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발명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TV가 아닐까 싶다. 존 베어드(John Logie Baird)가 1926년 최초로 선보인 이래, 텔레비전은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으며 기술의 발전과 함께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부터 시작되었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대한방송’은 미국의 RCA사와 민간자본이 합작회사로 발족해 호출부호 'HLKZ'로 방송했다. 카메라 두 대로 하루 두 시간 방송을 선보였다. 라디오로 듣는 데 익숙했던 사람들은 TV를 보며 ‘활동사진 붙은 라디오’란 별명을 붙였다.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 4번째로 TV방송을 시작한 ‘대한방송’은 TV가 보급되기 힘든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와 1959년 화재까지 겹쳐 1961년 방송을 중단하게 되었다.
대한방송의 시대가 지고 TV 삼국시대가 열리다
“KBS, 여기는 <채널9> 서울텔레비전방송국입니다. HLCK”
1961년 12월 31일 '국영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TV 방송 시대가 열렸다.
“TV 방송에는 시청자가 먼저 확보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미제 RCA와 일제 내셔널 등 2만 대의 수상기를 수입, 월부로 판매하였는데 이때 월부구매를 원하는 사람의 수는 대단한 것이어서 접수용지만 해도 20만 장이 나갔다는 소문과 용지 값만 해도 TV대금에 가깝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이것이 서울이다 (19) 라디오·TV」, 매일경제, 1967년 9월 21일자 기사
1964년 12월 7일 개국한 동양텔레비전방송국(DTV,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은 1965년 라디오서울(RSB)과 합병하여 중앙방송(JBS)이란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선보였다. 하지만 중앙방송이라는 사명(社名)이 서울중앙방송국(KBS)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1966년 7월 TBC로 변경되었다.

1969년 8월 8일 MBC-TV가 개국했는데, MBC는 교육방송으로 허가를 받고 교육방송 위주의 편성을 하다가 1970년 상업 방송을 선언하면서 오락 위주의 편성으로 전환하였다.
그때부터 KBS, TBC, 그리고 MBC의 방송 3파전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TV 수상기의 보급이 경쟁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 방송의 과열경쟁이 벌어졌고, 이를 해소할 방안이 국무회의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KBS는 국영방송 체제에서 벗어나 공영방송체제로 개편된다. 1970년「한국방송공사법」이 확정되고 1973년 '한국방송공사'가 발족하였다.이와 함께 MBC는 경향신문을 흡수․통합하며 지역의 독립 민영 상업방송국들을 ‘문화방송’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독점적인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TBC는 호남지역의 라디오사와 프로그램 제휴계약을 맺으며 네트워크망을 넓혀나갔다.
편성권 반납의 해부터 방송사 통폐합까지
1974년 긴급조치 9호 이후 프로그램 편성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6년에는 방송사들이 획일적인 편성정책에 맞춰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했는데, 오전 6시는 어린이 시간대, 7시는 뉴스와 가족 시간, 8시는 사회, 정책, 경제 PR 시간 등으로 정해져 있어 채널은 달랐지만, 비슷한 내용의 방송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는 이른바 ‘편성권 반납의 해’를 보내게 되었다. 1980년대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TBC는 KBS에 흡수되고 MBC는 공영화되었다. 1980년 9월 1일 한국방송협회가 실시한 방송 자율정화방안을 시행하고 국민교육과 교양방송을 저해하는 저속한 방송을 일체 금지했다. 어린이 공상 만화영화와 여성의 위생용품 광고가 금지되는 등 여러 규제가 잇따랐다.
컬러 TV의 시대, 다채로웠던 1980년대의 방송
1981년 1월 1일부터 우리나라에서 컬러 TV 방송 시대가 열렸다. 화려한 영상과 더불어 쇼와 드라마는 대형화되었고, 뉴스쇼와 보도 프로그램들이 선보이며 텔레비전 저널리즘 시대를 이끌었다.그리고 KBS가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방송은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방송이란 기록을 세웠다.
2013년 서울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목록을 작성하면서 인류 무형유산 분야에 이 프로그램과 관련된 기록물을 포함시켰다.1980년대부터 TV 방송을 통해 대통령 후보들이 토론회를 벌였고, 국회 청문회는 생중계되며 사람들 사이에선 어제 본 TV 프로그램 내용이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텔레비전의 오락적 측면 외에 교육적인 측면도 강조되었다. 1980년 7월 30일 정부가 과열과외 억제책으로 ‘괴외전면금지’를 선언하면서 KBS가 제3TV를 통해 선보이던 ‘TV 고교 가정학습’이 새삼 주목받게 됐다. 1951년 KBS에서 교사 교육을 목적으로 선보인 교육방송은 1980년대 입시준비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그 역할이 중요해졌고, 1990년에는 KBS에서 분리되어 한국교육개발원 부설 교육방송으로 송출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EBS가 탄생했다.
1991년 12월 서울방송(SBS)이 개국하면서 방송사 간의 시청률 경쟁이 심해졌다. 방송의 선정성, 저질성 시비가 잇따랐고, ‘TV 속의 TV’ 등 방송사들은 자체 비평 프로그램을 만들며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1995년부터는 지역에 민영텔레비전방송이 개국했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가 방송영상산업진흥책으로 독립 제작사를 집중 육성하였다. 이로써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열리며 우리 방송 프로그램이 해외로 그 시장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2001년 지상파TV의 디지털방송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방송 프로그램을 부적절한 언어, 폭력성, 선정성 등의 기준으로 5등급으로 나눠 TV화면에 표기하는 제도인 방송프로그램 등급제도 시행되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가 무색하게 지금은 케이블과 IPTV, 다양한 위성방송이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다. TV 리모콘을 누르면 끝도 없는 채널이 검색되는 채널 홍수의 시대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까지 개국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언론을 가리켜 제4의 권력이라고 부르지만, 그 중에서도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가장 강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만큼, 거대 자본의 언론시장 장악과 언론의 독과점 현상에 대한 우려도 간과할 수 없다. 다채널 시대, 좋은 방송을 해야 하는 방송국의 책임과 함께 좋은 방송을 선별할 줄 아는 시청자의 안목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텔레비전의 역사

텔레비전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시기에 다수에 의하여 이루어진 개념으로, 전파 시스템을 통한 최초의 동영상 전송에서는 기계적 회전 천공 디스크인 닙코프 디스크를 사용하여 화면을 시간변동 신호로 스캔한 후, 이를 수신기에서 다시 변환하여 원래 이미지를 복구하였다.
텔레비전의 개발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이미지를 전자식으로 스캔하고 표시하는 완전 전자식 텔레비전이 표준으로 되었다. 전송된 이미지에 색상을 추가하는 여러 가지 표준이, 기술적으로 서로 호환되지 않는 신호 표준을 사용하여 다수의 지역에서 개발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도로 활성화되어 광고, 선전, 오락을 위한 중요한 대중 매체가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은 지상파 송신소에서 송신하는 VHF 및 UHF의 무선 신호, 지구 궤도 위성에서 마이크로파 신호를 통하여 공중으로 전송되거나, 또는 케이블 TV를 통하여 유선으로 개별 소비자에게 전송된다. 많은 국가에서는 원래의 아날로그 방송 방법에서 벗어나 이제는 디지털 TV 표준을 사용하여 추가적인 작동 기능을 제공하고 전파 스펙트럼의 대역폭을 절약하여 보다 수익성 있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목록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배포될 수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에 걸쳐 프로그래밍을 배포할 수 있는 장거리 초단파 네트워크와 같은 기술의 지속적인 개발에 의해 지원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을 위한 비용은, 민간 또는 정부 기관이 지불하는 광고 수익에 의하거나 또는 일부 국가에서는 수신기 소유자가 지불하는 텔레비전 수신료로 방송 자금을 조달한다. 특히 케이블이나 위성을 통해 전달되는 일부 서비스에 대해서는 수신자에 의한 구독료에 의하기도 한다.
3차원 텔레비전은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화면 재생 방식의 한계로 인해서 소비자들에게는 널리 수용되지 않고 있다. 비디오 녹화 방법을 사용하면 프로그래밍을 편집하고 재생하여 나중에 방송할 수 있게된다.
기계식 텔레비전

팩시밀리 전송 시스템은 19세기 초 기계적으로 그래픽을 스캔하는 방법을 개척했다. 스코틀랜드의 발명가인 알렉산더 베인은 1843년에서 1846년 사이에 팩시밀리 기계를 소개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프레드릭 베이크웰은 실험실 버전으로 작동하는 팩시밀리를 1851년에 시연했다. 전신선을 활용하여 작동하는 최초의 실용적인 팩시밀리 시스템이 1856년부터 이탈리아의 신부인 지오반니 카셀리에 의해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1873년 영국의 전기공학자 윌러비 스미스(Willoughby Smith)는 셀레늄 원소에서 광전도성을 발견했고, 이 발견은 1895년 초에 전화선을 통해 정지 이미지를 전송하는 방법인 전신 사진, 모든 종류의 전자 이미지 스캐닝 장치(정지 및 동작 모두), 및 궁극적으로 TV 카메라 기술 등으로 이어졌다.
23세의 독일 대학생이던 파울 고틀리프 닙코프는 1884년 베를린에서 닙코프 디스크를 고안하여 특허를 받았다. 이것은 나선형 구멍 패턴이 있는 회전하는 디스크로, 각 구멍에 의하여 이미지가 선형으로 스캔되었다. 그는 실제로 작동 모델을 구축한 적은 없지만 닙코프의 회전 디스크, 즉 "이미지 래스터라이저"를 변형한 것들이 매우 보편화되었다.
콘스탄틴 페르스키(Constantin Perskyi)는 1900년 8월 24일 파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개최된 〈국제 전기 회의〉에 제출한 논문에서 텔레비전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페르스키의 논문에서는 닙코프 등의 연구를 언급하면서 기존의 전기 기계 기술에 대하여 검토했다. 그런데 1907년 리 드포리스트와 아서 코른에 의해 증폭관 기술이 개발되면서 이러한 설계가 비로소 실용적이 되었다.
이미지의 즉시 전송에 대한 최초의 시연은 1909년 파리에서 조르쥬 리루(Georges Rignoux)와 A. 푸르니어(A. Fournier)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계적 정류자에 개별적으로 연결된 64개의 셀레늄 셀의 배열이 전자적인 망막 역할을 했다. 수신기에서는 일종의 커 셀에 의하여 빛을 변조하고, 이 변조된 빔을 회전하는 디스크의 가장자리에 부착된 일련의 다양한 각도의 거울에 의하여 디스플레이 화면으로 주사하였다. 송신기와 수신기의 동기화는 별도의 회로에 의하여 조정되었다. 이 개념 증명을 위한 시연에서 8×8 픽셀 해상도는 알파벳의 개별 문자를 명확하게 전송하기에 충분했는데, 초당 "여러 번" 업데이트된 이미지가 전송되었다.
1911년에 보리스 로싱과 그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은 기계식 거울-드럼 스캐너를 이용하여 전선을 통하여 "브라운관"( 음극선관 또는 "CRT" ) 수신기까지, 즈보르킨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매우 조잡한 이미지"를 전송하는 시스템을 제작했다. 동영상은 스캐너의 "감도가 충분하지 않고 셀레늄 셀이 매우 느렸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1914년 5월, 아치볼드 로우는 런던의 자동차 엔지니어 협회에서 자신의 텔레비전 시스템을 처음으로 시연했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을 '텔레비스타'(Televista)라고 불렀다. 이 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보도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무선으로 보다"(Seeing By Wireless)라는 제목이 붙었다. 시연은 해리 고든 셀프리지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서, 1914년 자신의 매장에서 열린 과학 및 전기 전시회에 텔레비스타를 포함시켰다.[9][10] 또한 영국 주재 미 영사관의 칼 레이먼드 루프 부영사도 크게 흥미를 느껴서, 로우의 시스템에 대한 상당한 세부 정보가 포함된 런던 주재 미국 영사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11][12] 로우의 발명품에서는 매트릭스 검출기(카메라) 및 모자이크 스크린(수신기/뷰어)을 사용하였는데, 전자 기계식 스태닝 메커니즘이 있어 셀 접점 위로 회전 롤러를 이동시키면서 카메라/뷰어 데이터 링크에 멀티플렉스 신호를 제공하였다. 수신기에서도 송신기와 유사한 롤러를 사용했으며 송신기와 수신기의 두 개의 롤러는 동기화되었다. 이것은 20세기의 어떠한 다른 TV 시스템과도 달랐으며 어떤 면에서 로우는 현대적 디지털 TV보다 80년 앞서 디지털 TV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런던에서 이러한 시연이 있은 직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민감한 군사 업무인 영국 무인 항공기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1917년까지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의 "텔레비스타"에 관한 특허 번호 191,405는 "광학 이미지의 전기 전송을 위한 개선된 장치"라는 제목으로 1923년에 마침내 출판되었는데, 이러한 지연은 보안상의 이유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특허에서는, 스캐닝 롤러가 어레이의 각 행에 있는 셀에 해당하는 전도성 접점 행을 갖고 있으며 롤러가 회전함에 따라 차례로 각 셀을 샘플링하도록 배열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수신기 롤러도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어 회전할 때마다 롤러가 셀 배열을 가로지르면서 한 줄의 셀을 처리한다. 이를 미국에 보고한 루프 부영사의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즉, . . . "수신기는 얇은 강철 슬레이트를 통과하는 편광의 통과에 의해 작동되는 일련의 셀로 구성되며 수신기에서 송신기 앞의 물체는 깜박이는 이미지로 재생된다", "롤러는 다음의 모터로 구동된다. 분당 3,000번의 회전과 그로 인한 빛의 변화는 일반 도선을 따라 전송된다" 그리고 특허에는 "셀레늄 셀을 각 공간에 배치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로우는 셀을 액체 유전체로 덮고 각 셀이 회전하여 어레이 위로 이동할 때 각각의 셀은 다시 이 매체를 통해 차례로 연결되었다. 수신기는 특허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그것을 통과하는 전류에 따라 더 많거나 적은 빛을 전달하는..." 셔터 역할을 하는 바이메탈 요소를 사용했다. 로우는 시스템의 주요 결함은 광파를 전기 임펄스로 변환하는 데 사용되는 셀레늄 셀로 이것이 너무 느리게 반응하여 효과를 망친다고 말했다. 루프는 "이 시스템은 4마일 거리에 해당하는 저항을 통해 테스트 되었지만 로우 박사의 견해로는 훨씬 더 먼 거리에서도 똑같이 효과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허에는 이 연결이 유선 또는 무선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롤러의 전도성 부분이 백금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장치 비용이 상당하다. . ."고 보고하고 있다.
1914년 이 시연에는 많은 미디어가 관심을 보였고 5월 30일 《더 타임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발명가인 A. M. 로우 박사가 시각적 이미지를 유선으로 전송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 발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곧 사람들을 원격으로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An inventor, Dr. A. M. Low, has discovered a means of transmitting visual images by wire. If all goes well with this invention, we shall soon be able, it seems, to see people at a distance). ”
5월 29일 《데일리 크로니클》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로우 박사가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장치를 사용하여 최초로 대중 앞에서 시연을 했는데, 그는 이 장치를 이용하면 전기를 사용하여 전화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서로를 볼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Dr. Low gave a demonstration for the first time in public, with a new apparatus that he has invented, for seeing, he claims by electricity, by which it is possible for persons using a telephone to see each other at the same time). ”
1927년, 로널드 프랭크 틸트먼은 로우에게, 자신의 저서에서 로우의 관련 특허를 언급하면서 그의 업적을 인정하면서 저서에 '포함하기에는 너무 기술적 성격'이라는 사과문과 함께 저서의 서론을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13] 나중에 로우는 1938년 특허에서 절연된 기판에 세슘 합금을 증착하는 공정에 의해 달성되는 훨씬 더 큰 '카메라' 셀 밀도를 구상했다. 로우의 시스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했는데, 이는 주로 반사광으로 이미지를 재현할 수 없고 명암의 계조를 동시에 묘사할 수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보리스 로싱의 시스템과 같이 계조를 주로 재현한 시스템 목록에 추가될 수 있다.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는 이후의 기술 발전으로 수십 년 후에는 실행 가능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비현실적이었다.
1923년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존 로지 베어드는 닙코프 디스크를 사용하는 완전한 텔레비전 시스템을 구상했다. 닙코프 디스크는 모호하고 잊혀진 특허로 당시에는 전혀 명확하지 않았다. 그는 중병에서 회복 중이던 헤이스팅스에서 첫 시제품을 만들었다. 1924년 말, 베어드는 런던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실험을 계속했다. 1925년 3월 25일 존 로지 베어드는 런던의 셀프리지스 백화점에서 TV로 방영된 실루엣 이미지를 최초로 공개 시연했다.[14] 이때 피사체로 사용되는 사람의 얼굴은 색상의 대비가 불충분하여 자신의 시스템에 표시할 수 없어서, 그는 삭제본(cutout)을 방영했다. 1925년 중반에는 인형을 사용했는데, 이는 복화술사가 사용하는 것으로 나중에 "Stooky Bill"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피사체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화장을 시켰다. 또한 "Stooky Bill"은 이러한 실험에 사용된 눈부신 수준의 빛 앞에서 오랜 시간 불평함이 없이 가만히 둘 수 있었다. 그런데 1925년 10월 2일에는 인형의 머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갑자기 화면에 나타나게 할 수 있었고, 1926년 1월 26일 실제 인간 얼굴의 이미지 전송을 왕립 연구소의 저명한 과학자 40명을 위해 시연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공영 텔레비전 시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베어드의 텔레비전 시스템에서는 닙코프 디스크를 사용하여 영상을 주사하여 표시하였다. 고정된 광전지를 가로질러 이미지를 스쳐지나가는 렌즈가 장착된 회전하는 닙코프 디스크 앞쪽에는 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피사체를 설치했다. 이때 피사체에서 반사된 빛을 수신한 것은 아마도 미국의 테오도어 케이스가 개발한 황화 탈륨(Thalofide) 셀로 추정된다. 여기서 생성된 전기 신호는 전파를 통해 수신기 장치로 전송되었다. 전송된 신호는 송신측의 디스크와 시간적으로 동기 되어 있는 수신측의 닙코프 디스크 뒤편에 설치되어 있는 네온 전구에 적용되어, 네온 램프의 밝기가 영상의 각 지점의 밝기에 비례하여 변동되었다. 디스크에 부착된 각각의 렌즈가 스캔하며 지나갈 때 영상의 스캔 라인이 재생되었다. 이 초기 장치의 베어드 디스크에는 16개의 렌즈가 있었지만 다른 디스크의 사용과 함께 인간의 초상을 인식하기에는 충분한 32개의 스캔 라인으로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었다. 베어드는 초당 5개의 프레임 속도로 시작했는데, 곧 초당 30개의 스캔 라인으로 121⁄2개의 프레임 속도로 증가하였다.
1927년 베어드는 438 마일 (705 km) 런던과 글래스고 사이의 전화선으로 신호를 전송하였다. 1928년, 베어드의 회사인 '베어드 텔레비전 개발 회사/시네마 텔레비전'에서는 런던과 뉴욕 사이의 최초의 대서양 횡단 텔레비전 신호와 최초의 육상 선박 전송을 방송했다. 1929년에 그는 독일 최초의 실험적인 기계식 텔레비전 서비스에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베어드와 파테사의 버나드 네이턴은 프랑스 최초의 텔레비전 회사인 '텔레비전-베어드-네이턴 사'를 설립했다. 1931년에 그는 Derby의 최초의 야외 원격 방송을 제작하였다. 1932년에 그는 초단파 텔레비전을 시연했다.
'베어드 텔레비전 회사'의 기계 시스템은 회사의 크리스탈 팰리스 스튜디오와 나중에 1936년 BBC 텔레비전 방송에서 최고 240줄의 해상도에 도달했지만, 액션 샷 기계 시스템에서는 앉아 있는 발표자와는 달리 TV로 방영되는 장면을 직접 스캔하지 않았고, 대신에 17.5mm 필름으로 촬영한 다음 빠르게 현상한 다음 필름이 아직 젖어 있는 동안에 이를 스캔했다.
1930년대 기계 시스템에 관한 스코포니 사의 성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에서 텔레비전 사업이 축소되었을 때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 발명가인 찰스 프랜시스 젠킨스도 텔레비전을 개척했다. 그는 1913년에 "무선 영화"에 대한 기사를 발표했지만 1923년 12월이 되어서야 증인을 위해 움직이는 실루엣 이미지를 전송했다. 1925년 6월 13일, 젠킨스는 실루엣 사진의 동시 전송을 공개적으로 시연했다. 1925년에 젠킨스는 닙코프 디스크를 사용하여 움직이는 장난감 풍차의 실루엣 화면을 메릴랜드에 있는 해군 라디오 방송국으로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까지 5마일 이상 전송했는데, 여기서는 48 라인 해상도를 가지는 렌즈 부착식 디스크를 사용하였다. 젠킨스는 자신의 발명에 대하여 1922년 3월 13일에 특허출원하여 1925년 6월 30일 미국 특허 제1,544,156호("무선으로 사진 전송")를 받았다.
1926년 12월 25일 타카야나기 켄지로는 일본의 하마마쓰 공업고등학교에서 닙코프 디스크 스캐너와 CRT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40줄 해상도의 텔레비전 시스템을 시연했다. 이 시제품은 현재 시즈오카 대학 하마마츠 캠퍼스 타카야나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27년까지 타카야나기는 해상도를 100줄로 개선했으며, 이는 1931년까지 최고였다.[20] 일본에서 그는 최초의 완전 전자식 텔레비전을 완성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생산 모델을 만들기 위한 그의 연구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미국에 의해 중단되었다.
1927년 벨 전화 연구소의 한 팀은 청중이 이미지를 볼 수 있도록 평면 패널 플라스마 디스플레이의 시제품을 사용하여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텔레비전 전송을 시연했다.[22] 단색 디스플레이는 2피트 x 3피트 크기에 2500픽셀이었다. 1927년 4월 7일, 벨 전화 연구소의 허버트 E. 이브스와 프랭크 그레이는 기계식 텔레비전에 관하여 극적인 시연을 하였다. 이 반사광을 이용하는 TV 시스템에는 소형 및 대형 시청 화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는데, 작은 수신기에는 2 인치 폭에 2.5 인치 높이의 화면을 가지고 있었고, 큰 수신기에는 24 인치의 폭과 30인치 높이의 화면이 있었다. 두 세트 모두 어느 정도 정확한 단색의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화면과 함께 이와 동기된 음향도 수신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에서는 두가지의 경로를 통해 이미지를 전송했는데, 첫 번째는 워싱턴에서 뉴욕 시로 연결되는 구리선 연결이고, 다른 하나는 뉴저지 주 휘파니로 부터 연결되는 무선 연결이었다. 두 가지의 전송 방법을 비교한 시청자는 품질에 차이가 없다고 확인하였다. 텔레비전 방송의 대상에는 상무부 장관인 허버트 후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방송을 하고자 하는 대상을 플라잉 스폿 스캐너 빔으로 조사하였다. 조사 빔을 생성하는 스캐너에는 50개의 개구(aperture)를 갖춘 디스크가 있었는데, 이 디스크는 초당 18프레임에 해당하는 속도로 회전하여 약 56 밀리초 마다 1 프레임을 캡처 하였는데, 오늘날의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초당 30 또는 60프레임 즉, 33.3 또는 16.7밀리초마다 한 프레임을 전송한다. 텔레비전 역사가인 앨버트 에이브럼슨은 벨 랩에서의 시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기계식 시스템으로 구현된 최고의 시연으로, 다른 시스템의 화질은 몇 년이 지나야 이 시스템과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될 것이다."[23]텔레비전 방송의 대상으로는 상무부 장관인 허버트 후버가 포함되어 있었다. 플라잉 스폿 스캐너 빔이 이러한 대상을 조명했다. 빔을 생성하는 스캐너에는 50개의 개구(aperture)가 있는 디스크가 있었다. 디스크는 초당 18프레임의 속도로 회전하여 약 56 밀리초 마다 1프레임을 캡처 하였는데, 이에 반하여 오늘날의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초당 30 또는 60프레임 즉, 33.3 또는 16.7밀리초마다 한 프레임을 전송한다. 텔레비전 역사가인 앨버트 에이브럼슨은 벨 랩에서의 시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이것은 현재까지 기계식 시스템으로 구현된 최고의 시연으로, 다른 시스템의 화질이 이 시스템과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되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다."라고 강조했다.[24]
1928년 WRGB (당시는 W2XCW)는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시작되었다. 뉴욕 스키넥터디에 있는 종합 전기회사 시설에서 방송 되었다. 이것은 "WGY 텔레비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소련에서는 레온 테레민이라는 발명가가 전기기계식 텔레비전을 발명하였는데, 1925년 16줄의 해상도를 갖는 전기 기계식 텔레비전으로 시작하여 1926년에는 비월주사 방식을 사용한 32 라인 해상도를 갖는 미러 드럼에 기초한 기계식 텔레비전을, 나중에는 64 라인의 미러 드럼에 기초한 텔레비전을 개발했다. 1926년 5월 7일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5피트 정사각형 스크린에 전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화상을 전송하여 투사했다. 1927년까지 100개의 라인으로 구성되는 화면을 전송하였는데 이것은 미국의 알씨에이사가 1930년에 120 라인의 화상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넘어서지 못한 해상도이다. 이 원반에 만들 수 있는 구멍의 갯수에는 제한이 되어 있었고, 특정한 지름을 초확하는 원반은 실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식 텔레비전의 이미지 해상도는 30 줄에서 최대 약 120줄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 라인 전송의 이미지 품질이 기술 발전으로 꾸준히 개선되어 1933년 까지 베어드 시스템을 사용 하는 영국의 방송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였다.[25] 200 라인 영역에 이르는 몇 가지 시스템도 방송 되었다. 이 중에서 두 가지는 1935년 파리에 Compagnie des Compteurs(CDC)에 의하여 설치된 180라인 시스템과 Peck Television Corp.에 의하여 1935년 몬트리올의 VE9AK 방송국에서 시작된 180라인 시스템이다.
슬로베니아의 안톤 코델리(Anton Codelli, 1875년 3월 22일 – 1954년 4월 28일)는 귀족이면서 열정적인 발명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동차용 소형 냉장고와 새로운 로터리 엔진 설계를 고안했다. 텔레비전에 흥미를 느낀 그는 자신의 기술을 새로운 매체에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텔레비전 기술의 가장 큰 과제는 인식할 수 있는 형상을 재현하기에 충분한 해상도로 이미지를 전송하는 것이었다. 미디어 역사가인 Melita Zajc가 자세히 설명했듯이 대부분의 발명가는 시스템에서 사용하는 라인 수를 늘리기로 결정했다. 일부는 당시 매직 넘버인 100 라인에 근접했다. 그러나 코델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에 그는 하나의 선이 있는 텔레비전 장치를 개발했지만 화면에 연속적인 나선형을 형성했다. 코델리는 인간의 눈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독창적인 디자인을 했다. 그는 주변 시야에 보이는 물체가 중앙에 있는 물체만큼 날카로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지가 중앙에서 가장 선명한 코델리의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은 잘 작동했으며 곧 아내인 '일로나 폰 드라세라자르'(Ilona von Drasche-Lazar)의 이미지를 공중으로 전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전자 대기업인 텔레푼켄 사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코델리의 텔레비전 시스템은 결코 상업적인 현실이 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전자식 텔레비전이 지배적인 시스템으로 부상했고 코델리는 다른 프로젝트로 이동했고, 그의 발명품은 거의 잊혀졌다.
1935년까지 미국에서는 1939년까지 계속된 공립 대학에서 운영하는 소수의 방송국을 제외하고는 저화질 전자 기계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되었다. 연방 통신위원회(FCC)는 텔레비전이 일관된 기술 표준 없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의 모든 방송국은 실험적이고 비상업적인 라이선스만 부여받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의 경제 발전을 방해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1934년 8월 필로 판즈워스가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완전 전자 시스템을 시연하면서 텔레비전의 미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미지 해부기 및 기타 카메라 튜브 및 재생기용 음극선관을 포함하는 완전 전자식 텔레비전의 개발은 종전 텔레비전의 지배적인 형태인 기계 시스템의 종말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기계식 TV는 일반적으로 작은 이미지만 생성했으며, 1930년대까지 TV의 주류였다. 마지막 기계 텔레비전 방송은 1939년에 미국의 소수의 공립 대학에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 종료되었다.
전자식 텔레비전

1897년 영국의 물리학자인 J. J. 톰슨은 그의 세 가지 유명한 실험에서 현대 음극선관 (CRT)의 기본 기능인 음극선 편향을 할 수 있었다. CRT의 초기 버전은 1897년 독일의 물리학자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이 발명하여 브라운관이라고도 한다. Braun은 CRT를 디스플레이 장치로 사용하는 것을 최초로 생각했다.[32] 형광체가 코팅된 스크린이 있는 크룩스 튜브의 변형인 냉음극 다이오드였다. 브라운관은 20세기 텔레비전의 기초가 되었다.[33] 음극선관은 1906년 독일인 막스 디크만(Max Dieckmann) 교수에 의해 디스플레이 장치로 성공적으로 시연되었으며, 그의 실험 결과는 1909년 《사이언티픽 어메리컨》 저널에 게재되었다.[34] 1908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인 앨런 아치볼드 캠벨스윈튼은 과학 저널인에 전송 및 수신 장치 모두에 음극선관 (또는 브라운관)을 사용하여 "원격 전기 비전"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편지를 발표했다.
그는 1911년 런던에서 한 연설에서 자신의 비전을 확장했으며 《더 타임스》[37]와 《뢴트겐 학회 저널》에 보고했다.[38][39] 1926년 10월 《네이쳐》에 보낸 편지에서 캠벨스윈턴은 GM 민친 및 J.C.M. 스탠턴과 함께 수행한 "성공적이지 않은 실험"의 결과도 발표했다. 그들은 음극선 빔으로 동시에 스캔되는 셀레늄 코팅 금속판에 이미지를 투사하여 전기 신호를 생성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실험은 G. M. 민친이 사망한 1914년 3월 이전에 실시되었다.[42] 그들은 나중에 1937년에 EMI의 H. Miller와 J.W. Strange, 및 RCA의 H. Iams와 A. Rose의 두 팀에 의해 반복되었다. 두 팀 모두 원본 캠벨스윈턴의 셀레늄 코팅 플레이트로 "매우 희미한" 이미지를 전송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음극선관을 수신기로 사용하는 실험을 했지만 송신기를 송신기로 사용한다는 개념은 참신했다.
열음극을 사용한 최초의 음극선관은 존 B. 존슨 ( 존슨-나이퀴스트 노이즈라는 용어에 이름을 붙인 사람)과 웨스턴 일렉트릭 사의 해리 와이너 와인하트(Harry Weiner Weinhart)가 개발하여 1922년 상용 제품이 되었다. 이 초기 전자 카메라 튜브( 이미지 분해기 와 같은)는 매우 실망스럽고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들은 피사체를 스캔했고 각 지점에서 보이는 것은 스캐닝 시스템이 통과하는 순간에 보이는 작은 빛 조각뿐이었다. 실용적인 기능성 카메라 튜브는 나중에 전하 저장식 카메라 튜브로 알려지게 된 다른 기술적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그것은 1926년에 헝가리의 티허니 칼만에 의하여 발견되고 특허를 받은 새로운 물리적 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1930년경부터 널리 이해되어 인식되기 시작했다. 열음극을 이용하는 최초의 음극선관은 존슨-나이퀴스트 노이즈라는 용어에 이름이 붙여진 존 B. 존슨 과 웨스턴 일렉트릭 사의 해리 와이너 와인하트(Harry Weiner Weinhart)가 개발하여 1922년에 상용 제품이 되었다.
전송 튜브 혹은 "카메라" 튜브의 낮은 전기 출력을 초래하는 빛에 대한 낮은 감도 문제는 1924년 초 헝가리 엔지니어 티하니 칼만이 전하 저장 기술을 도입하여 해결하였다. 1926년에 티하니는 완전 전자식의 스캐닝 및 디스플레이 요소를 활용하는, 스캐닝(또는 "카메라") 튜브 내에 "전하 저장" 원리를 사용하는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의 해결 방법은 하나의 스캔 주기 동안 튜브 내에 전하("광전자")를 모아서 저장하는 카메라 튜브였다. 이 장치는 1926년 3월 그가 "라디오스코프"이라고 명명한 텔레비전 시스템에 대하여 헝가리 에서 제출한 특허 출원서에서 최초로 설명되었다. 1928년에 추가적인 개량을 특허 출원에 포함한 이후에,[47] 1930년 영국에서 티하니의 특허가 무효로 선언되었고,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하였다.
그의 이러한 획기적인 개선책은 1931년 RCA사에서 " 아이코노스코프 " 디자인으로 통합되게 되는데 티하니의 전송 튜브에 대한 미국 특허는, 1939년 5월까지 특허 등록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수신관에 대한 특허는 이미 10월에 승인되었다. 티하니의 특허출원 2건은 모두 특허등록 되기 전에 RCA에서 매입하였다. 티하니에 의한 전하 저장식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텔레비전용 촬상 장치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존속하고 있다.
1926년 12월 25일 타카야나기 켄지로는 일본의 하마마쓰 공업고등학교에서 CRT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40라인 해상도의 TV 시스템을 시연했다. 타카야나기는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1927년 9월 7일, 필로 판즈워스는 최초의 영상인 간단한 직선을 영상 분해기 카메라관을 이용하여 샌프란시스코의 202 Green Street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전송했다. 1928년 9월 3일이 되자 그는 언론을 위한 시연을 하기에 충분한 시스템을 개발하여 시연을 하였는데 이것은 최초의 전자식 텔레비전 시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56] 1929년에는 모터 발전기를 제거하는 식으로 더욱 개선하여 그의 텔레비전 시스템에는 마침내 기계 부품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해에 판즈워스는 자신의 아내 엘마("Pem")의 3.5인치 영상을 포함하는 최초의 라이브 인간 이미지를 자신의 시스템을 이용하여 전송했는데, 엘마는 아마도 밝은 조명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다.
한편,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은 이미지를 만들고 보여주기 위해 음극선관을 실험하고 있었다. 1923년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서 일하면서 그는 전자 카메라 튜브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5년 시연에서는 이미지가 어둡고 대비가 낮고 선명도가 낮았으며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이미징 튜브는 결코 실험실 단계를 넘어선 적이 없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 특허를 획득한 RCA는 판스워스의 1927년 이미지 해부기에 대한 특허가 너무 광범위하여 다른 전자 이미징 장치를 배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RCA는 즈보리킨의 1923년 특허 출원을 기반으로 판즈워스를 상대로 특허 저촉 심사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특허청 심사관은 1935년의 결정에서 이에 동의하지 않고, 판즈워스 발명의 즈보리킨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하였다. 판즈워스는 즈보리킨의 1923 시스템이 그의 특허에 이의를 제기하는 유형의 전기 이미지를 생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즈보리킨은 1923년 특허 출원에 대한 컬러 전송 버전에 대해 1928년에 특허를 받았으며 그는 또한 1931년에 원래 출원을 분할했다. 즈보리킨은 그의 1923년 특허 출원을 기반으로 한 그의 튜브 작동 모델의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거나 제시할 의사가 없었다. 1939년 9월, 법원 항소에서 패소하고 TV 장비의 상업적 제조를 진행하기로 결정한 RCA는 판스워스의 특허를 사용하기 위해 판즈워스에게 라이선스 비용 외에 10년 동안 백만 달러를 지불했다.
1933년 RCA는 티하니의 전하 저장 원리에 의존하는 개선된 카메라 튜브를 출시했다. 즈보리킨이 아이코노스코프라고 명명한 이 새로운 튜브는 약 75,000럭스의 감도를 가지고 있어 판즈워스의 영상 분해기보다 훨씬 민감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판즈워스는 1930년에 연구를 시작하여 1931년에 시연한 독특한 "멀티팩터" 장치의 발명을 통해 영상 분해기의 전력 문제를 극복했으며, 이 작은 튜브는 신호를 60배 이상으로 증폭할 수 있으며[68] 모든 전자 분야에서 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불행하게도 멀티팩터의 문제는 빠른 속도로 그 성능이 저하된다는 것이었다.

1931년 8월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라디오 쇼에서 만프레드 폰 아르덴은 송신과 수신 모두에 CRT를 사용하는 최초의 완전 전자식 텔레비전 전송으로 텔레비전 시스템을 공개적으로 시연했다. 그러나 아르덴은 슬라이드와 필름을 스캔하기 위한 플라잉 스팟 스캐너 대신에 CRT를 사용하는 카메라 튜브를 개발하지 못하였다. 아르덴은 1933년 12월 24일에 텔레비전 사진을 처음으로 전송했고, 1934년에는 공영 텔레비전 서비스를 위한 테스트 실행이 이어졌다. 세계 최초의 전자 스캔 텔레비전 서비스는 1935년 베를린에서 시작되었으며 파울 닙코프 방송국이 베를린에서 독일 전역의 공공 장소로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생중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필로 판즈워스는 1934년 8월 25일부터 10일 동안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라이브 카메라를 사용하여 전자식 텔레비전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공개 시연했다.
영국에서 아이작 쇤베르그가 이끄는 이엠아이 사의 엔지니어링 팀은 1932년에 그들이 BBC용으로 설계한 카메라의 핵심이 되는 "에미트론"이라는 새로운 장치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1936년 11월, 에미트론을 사용하는 405 라인 방송 서비스가 알렉산드라 팰리스의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어 빅토리아 시대 건물의 탑 중 하나 꼭대기에 특별히 지어진 마스트에서 전송되었다. 인접한 스튜디오에서 베어드의 기계 시스템과 짧은 시간 동안 번갈아 사용했지만 에미트론에 의한 시스템이 더 안정적이고 눈에 띄게 우수했고,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고화질 텔레비전 정규 서비스였다. 원래의 미국식 아이코노스코프는 잡음이 많고 신호 대 간섭의 비율이 높았고 특히 당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고화질 기계식 주사 체계와 비교하여도 실망스러운 결과를 제공했다.
아이작 쇤베르그의 감독 하에 EMI 팀에서는 아이코노스코프 또는 에미트론에서 전자 신호를 생성하는 방법을 분석하여 효율성이 이론적 최대치의 약 5%에 불과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1934년에 수퍼 에미트론과 CPS 에미트론이라고 하는 새로운 두 개의 카메라 튜브를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특허를 받았다. 새롭게 개발된 수퍼 에미트론은 원래의 에미트론과 아이콘스코프 튜브보다 최소 10배에서 최대 15배 더 민감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새롭게 개발된 이미지 수신관은 1937년 종전일에 처음으로 BBC의 중계 방송에서 사용되어, TV를 통해 일반 대중들은 국왕이 기념비에 헌화하는 장면을 시청 할 수 있었다. 판즈워스나 RCA도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가 되어서야 생방송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웃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거리 장면을 생방송으로 시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편, 1934년 미국의 즈보리킨은 독일에서 아이코노스코프의 사용에 관하여 라이선스 받은 텔레푼켄사와 일부 특허권을 공유했다. 독일에서는 "수퍼이코노스코프"로 불리게 되는 이미지 아이코노스코프는 이러한 공동 작업의 결과로 제작 되었는데, 이 촬상관은 기본적으로 수퍼 에미트론과 동일하다.
유럽에서 수퍼 에미트론과 이미지 아이코노스코프의 생산과 상용화는 즈보리킨과 판즈워스 사이의 특허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즈보리킨은 1925 년 독일에서 《Lichtelektrische Bildzerlegerröhre für Fernseher》(텔레비전을 위한 광전 이미지 분해관)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는데[88] 이는 판즈워스가 미국에서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기 2년 전의 일이다. 이미지 아이코노스코프 또는 수퍼이코노스크포는 1936년부터 1960년까지 유럽 공영 방송에서 산업 표준이 되었는데, 그 후 이는 비디콘 및 플럼비콘 관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촬상관은 이미지 오르시콘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촬상관과 경쟁 하는 유럽의 전자관 전통을 대표 하는 것이었다.
독일 회사인 하이만사에서는 1936년에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을 위하여 수퍼 이코노스코프를 생산했고, 그후에 하이만사에서는 1940년부터 1955년까지 이것을 생산 하여 상용화했으며,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회사인 필립스사에서는 이미지 아이코노스크프와 멀티콘의 생산 및 상용화를 1952년 부터 1958년 까지 계속 지속하였다.
당시 미국 텔레비전 방송은 1941년 거래가 성사되고 표준이 합의될 때까지 별도의 기술로 프로그래밍과 우위를 놓고 경쟁하는 다양한 규모의 다양한 시장으로 구성되어, 예를 들어 RCA는 뉴욕 지역에서는 아이코노스코프만 사용했지만 필라델피아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판즈워스 영상 분해기를 사용했다.
1939년 9월 RCA는 판스워스의 특허에 접근하기 위해 향후 10년 동안 판스워스 텔레비전 및 라디오 회사에 로열티를 지불하기로 합의했고,[98] 이 역사적인 계약이 체결되면서 RCA는 판즈워스 기술의 장점을 시스템에 통합했다.[97]
1941년 미국은 525개의 주사선을 갖는 텔레비전을 구현했다.
세계 최초의 625 라인 텔레비전 표준은 1944년 소련에서 설계되었으며 1946년에 국가 표준이 되었다.[101] 625개 주사선 표준에 의한 최초 방송은 1948년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102] 하나의 프레임 당 625개 라인이라는 개념은 이후 유럽 CCIR 표준에서 구현되었다.
1936년 티하니 칼만은 최초의 평판 디스플레이 시스템인 플라즈마 디스플레이의 원리를 설명했다.
1978년에 제임스 P. 미첼은 CRT를 대체하기 위한 최초의 단색의 평면 패널 LED 디스플레이를 설명하고 시제품을 만들어 시연했다.
컬러 텔레비전
흑백 TV가 처음 제작되자마자 3개의 흑백 이미지를 사용하여 컬러 이미지를 생성하고자 하는 기본 아이디어에 대하여 실험이 이루어졌다.
1880년에 모리스 르 블랑이 텔레비전에 대한 가장 초기에 발표한 제안 중 하나는 컬러 시스템에 대한 것인데, 여기에는 텔레비전 문헌의 용어로 라인 및 프레임 스캐닝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나와 있지만 실제적인 세부 사항은 나와 있지 않다.
폴란드 발명가인 얀 스체파닉(Jan Szczepanik)은 1897년에 송신측에서는 셀레늄 광전지를 사용하고 수신측에서 전자석을 이용하여 진동하는 거울과 움직이는 프리즘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컬러 텔레비전 시스템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스템의 송신단에는 색상 스펙트럼을 분석하는 수단이 없어서 이 시스템이 그가 설명한 대로 작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발명가 호바네스 아다미안(Hovannes Adamian)도 이미 1907년에 컬러 텔레비전을 실험했는데, 최초의 컬러 TV 작업은 그에 의한 것으로 주장 되어, 1908년 3월 31일 독일에서 특허 제197183 호[109]를 받았고, 영국에서 1908년 4월 1일에 특허 제7219호를 받았으며, 1910년에는 프랑스 (특허 번호 제390326호) 및 러시아 (특허 번호 제17912호)에서도 특허를 받았다. 송신단과 수신단에서 3개의 나선형 구멍이 있는 스캐닝 디스크를 사용했는데 각 나선형 위치에는 청색, 녹색, 적색의 필터가 있었다. 수신측에서는 3개의 광원 있고, 이들의 밝기가 회전자에 의하여 조정이 되었다. 베어드는 또한 1938년 2월 4일 세계 최초의 컬러 방송을 만들어 베어드의 크리스탈 팰리스 스튜디오에서 기계적으로 스캔한 120라인 이미지를 런던의 도미니언 극장의 프로젝션 스크린으로 보냈다.
기계식 스캔 방식의 컬러 TV는 1929년 6월 벨 연구소에서 광전지와 증폭기, 글로우 튜브 및 빛의 3원색에 해당하는 적색, 청색, 녹색의 컬러 필터를 별도로 갖추고 있는 완전한 별개의 3개의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이 시스템에서는 빨강, 녹색 및 파랑 색상의 3개의 영상을 일련의 거울을 이용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중첩시켜서 완전한 색상이 포함되는 하나의 영상으로 만드는 것을 시연하였다. 최초의 전기-기계식 복합 방식의 순차식 필드 컬러 시스템은 1939년 7월에 또한 존 로지 베어드가 최초로 시연을 하면서 최초로 개발되었는데, 그의 시스템에는 동기화 된 빨간색과 청록색의 두 가지 색상으로 된 회전 필터를 송신측 카메라와 수신측 음극선관 전면에 배치하여 흑백의 단색 텔레비전 방송에 위색(가짜 색상)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1940년 12월에 조지 베어드는 600개의 주사선을 가지는 하이브리드 방식 필드 순차 컬러 텔레비전 시스템을 공개적으로 시연하였다. 이 장치의 깊이는 매우 "깊었다". 하지만 후에는 빛의 경로를 접는 거울을 사용하여 기존의 대형 콘솔과 유사한 완전히 실용적인 장치로 개선이 되었다. 그러나 베어드는 이 디자인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1944년 초에는 영국 정부 위원회에서 완전 전자 방식의 장치가 더 나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1939년 헝가리 엔지니어 페터 카를 골트마르크는 CBS 에서 아이코노스코프 센서가 포함된 전기 기계 시스템을 도입했다. CBS 필드 순차 컬러 시스템은 텔레비전 카메라 내부에서 빨강, 파랑 및 녹색 필터로 구성된 디스크가 1,200rpm으로 회전하고 유사한 디스크가 수신기 세트 내부의 음극선관 앞에서 동기화되어 회전하는 부분적으로 기계적이었다. 이 시스템은 1940년 8월 29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FCC)에 처음 시연되었으며 9월 4일 언론에 공개되었다.
CBS는 1940년 8월 28일에 벌써 필름을 사용하는 실험적인 컬러 현장 테스트를 하였으며, 11월 12일이 되자 생방송 카메라를 사용하는 테스트를 시작했다. NBC사는 RCA사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1941년 2월 20일에 최초의 컬러 TV 현장 테스트를 실시했다. CBS는 1941년 6월 1일부터 일일 컬러 필드 테스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컬러 시스템은 기존의 흑백 TV 세트와 호환되지 않았으며 현재 대중에게 제공되는 컬러 TV 세트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컬러 필드 테스트의 시청은 RCA 및 CBS사의 엔지니어와 초청된 언론인으로 한정되었다. 전쟁 생산 위원회에서는 1942년 4월 22일부터 1945년 8월 20일까지 민간용 텔레비전 및 라디오 장비의 제조를 중단시켜서 일반 대중에게 컬러 텔레비전을 소개할 기회가 차단되었다.
멕시코 발명가 귈레르모 곤잘레스 카마레나(Guillermo González Camarena)도 하이브리드 필드 순차 컬러 TV(처음에는 telectroescopía로 알려짐)를 실험했다. 그의 노력은 1931년에 시작되어 1940년 8월에 제출된 "3색 필드 순차 시스템" 컬러 텔레비전에 대한 멕시코 특허로 이어졌다.
1940년에 베어드는 벌써 그가 "텔레크롬"이라고 부르는 완전 전자식 시스템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초기의 텔레크롬 장치는 형광체 판의 양쪽을 겨냥하는 두 개의 전자총을 사용했다. 청록색과 자홍색 형광체를 사용하면 합리적으로 제한된 색상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단색 신호를 사용하여 3D 이미지(당시에는 "입체"라고 함)를 생성하는 동일한 시스템을 시연했다. 1944년 8월 16일의 시연은 실용적인 컬러 텔레비전 시스템의 최초 사례였다. 텔레크롬에 대한 작업은 계속되었고 풀 컬러용 3문 버전을 도입할 계획이 세워졌다. 이것은 형광체 판의 패턴 버전을 사용했으며 총은 판의 한쪽에 있는 융기 부분을 겨냥했다. 하지만 1946년에 베어드가 갑작기 사망하면서 텔레크롬 시스템의 개발이 중단되었다.
베어드의 시스템과 유사한 개념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일반적이었는데, 세 개의 전자총에서 생성된 색상을 재결합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상이하였다. 지어 관은 베어드의 개념과 유사하지만 베어드의 평평한 표면에 올린 3D 패터닝 대신에, 외부 표면에 형광체가 증착되어 있는 작은 피라미드를 사용했다. 페네트론에서는 3겹의 형광체를 층층이 쌓았고, 해당 색상을 그릴 때에는 빔의 세기를 높여 윗층까지 도달하게 했다. 크로마트론에서는 튜브에 수직 줄무늬로 배열된 유색 형광체를 선택하기 위해 포커싱 와이어 세트를 사용했다.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도입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기술적 과제 중 하나는 기존 흑백 표준보다 잠재적으로 3배인 대역폭을 원래대로 보존하여 과도한 전파 대역 폭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상당한 연구 끝에 국립 텔레비전 시스템 위원회 (NTSC) 에서 RCA 에서 개발한 완전 전자식 호환 색상 시스템을 승인하여 대역폭을 절약했다. 여기서 컬러 정보는 명도 정보와 별도로 인코드된 후, 대역폭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 해상도를 대폭 감소시켰다.

명도(luminance) 신호는 약간 감소된 해상도에서 기존 흑백 TV 세트와 호환되면서도, 색상(chroma)에 관한 추가 정보를 디코딩하여 제한된 해상도의 컬러 영상을 표시할 수 있었다. 고해상도 흑백 이미지와 저해상도 컬러 이미지가 뇌에서 결합되어 외관상 고해상도 컬러 이미지를 생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NTSC 표준은 주요한 기술 성과를 나타낸다.
미국에서는 1953년 완전 전자식의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도입되었는데[128] 높은 가격과 컬러 방송 프로그램의 빈약함으로 인해 시장에서의 수용은 매우 느렸다. 최초의 전국 컬러 방송인 '1954년 장미 퍼레이드 토너먼트'는 1954년 1월 1일에 시작되었지만, 이후 10년 동안 대부분의 네트워크 방송과 거의 모든 지역 프로그램이 계속 흑백으로 방송되었다.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컬러 텔레비전 세트가 대량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모든 네트워크 황금 시간대 프로그램의 절반 이상이 그해 가을 컬러로 방송될 것이라고 발표된 1965년의 컬러 전환에 인한 것이다. 불과 1년 후에는 최초의 올컬러 황금 시간대 시즌이 찾아왔다. 1972년 주간 네트워크 프로그램 중 마지막 홀드아웃이 컬러로 전환되면서 완전 컬러 네트워크 시즌이 최초로 탄생하였다. 초기 컬러 세트는 거실 입식 콘솔 모델이거나 부피가 거의 거실용만큼 크고 무거운 탁상용 버전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한 곳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1966년 봄에 GE가 출시한 상대적으로 작고 가벼운 Porta-Color 세트는 컬러 텔레비전 시청을 보다 유연하고 편리한 제안으로 만들었다. 1972년에는 마침내 컬러 세트의 판매가 흑백 세트의 판매를 넘어섰다.
유럽의 컬러 방송도 1960년대까지 PAL 방식으로 표준화되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흑백으로 방송하는 유일한 방송국은 작은 시장에 있는 몇 개의 높은 번호의 UHF 방송국과 휴양지와 같은 더 작은 시장에 있는 소수의 저전력 중계기 방송국이었다. 1979년까지 이들 중 마지막 세트도 컬러로 전환되었고 1980년대 초까지 흑백 세트는 틈새 시장, 특히 저전력 사용, 소형 휴대용 세트 또는 저전력 비디오 모니터 화면으로 사용되는 저비용 소비자 장비의 틈새 시장으로 밀려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영역에서도 컬러 TV 세트로 전환되었다.
디지털 텔레비전
디지털 텔레비전(DTV)에서는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된 후 다중화된 신호로 오디오 및 비디오를 전송하는데, 이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에서 완전 아날로그 및 채널 분리된 신호와 다른 점이다. 디지털 TV 방식에서는 아날로그 TV 방식과 동일한 채널 대역폭에서 둘 이상의 프로그램을 지원할 수 있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1950년대 컬러 텔레비전 이후 텔레비전 기술에서 최초의 중요한 진화를 나타내는 혁신적인 서비스 방식이다. 디지털 TV의 기원은 저렴한 고성능 컴퓨터의 가용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1990년대가 되어서야 디지털 TV에 진정한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일본의 가전 업체인 소니가 HDTV 기술과 HDTV 해상도로 녹화할 수 있는 HDVS 장비를 개발하였다. 또한 일본 방송사인 NHK가 제안한 아날로그 방식의 MUSE 표준은 미국 전자업체를 위협하는 선두주자로 여겨졌다. Sony의 시스템에서는 1125라인 해상도(또는 디지털 용어로는 1875x1125, Full HD 비디오의 해상도에 가깝다)로 이미지를 생성했다. 아날로그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일본의 MUSE 표준은 1990년 6월까지 고려 중인 23개 이상의 상이한 기술 개념 중에서 선두주자였다.
그런 다음 미국 회사인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사가 디지털 텔레비전 신호의 실현 가능성을 시연했다. 이 돌파구는 매우 중요하여 디지털 기반 표준이 개발될 수 있을 때까지 ATV 표준에 대한 결정을 미루도록 FCC를 설득할 수 있었다.
1990년 3월 디지털 표준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FCC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첫째, 위원회는 새로운 ATV 표준이 향상된 아날로그 신호 이상이어야 하지만 기존 TV 이미지 해상도의 최소 2배로 진정한 HDTV 신호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런 다음 새 디지털 TV 세트를 구입하지 않으려는 시청자가 기존 TV 방송을 계속 수신할 수 있도록 새로운 ATV 표준이 다른 채널에서 "동시 방송"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새로운 ATV 표준은 또한 새로운 DTV 신호가 완전히 새로운 설계 원칙을 기반으로 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 NTSC 표준과 호환되지는 않지만 새로운 DTV 표준은 많은 개선 사항을 통합할 수 있다. FCC가 채택한 최종 표준은 스캐닝 형식, 종횡비 또는 해상도 라인에 대한 단일 표준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인터레이스와 프로그레시브 스캐닝 프로세스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놓고 가전 업계(일부 방송사 포함)와 컴퓨터 업계(영화 업계 및 일부 공익 단체 포함) 간의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전 세계 텔레비전에서 사용되는 인터레이스 스캔은 짝수 라인을 먼저 스캔한 다음 홀수 라인을 스캔한다.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형식인 프로그레시브 스캔은 줄을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스캔한다. 컴퓨터 업계에서는 프로그레시브 스캐닝이 인터레이스 스캐닝 방식처럼 '깜박이지' 않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프로그레시브 스캐닝은 인터넷 연결을 더 쉽게 할 수 있고 인터레이스 형식으로 변환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저렴하다고 주장했다. 영화 산업은 또한 프로그레시브 스캐닝이 촬영된 프로그램을 디지털 형식으로 변환하는 보다 효율적인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에 지원했다. 소비자 가전 업계와 방송사는 인터레이스 스캐닝이 당시 가능한 최고 품질의 사진, 즉 사진당 1080라인과 라인당 1920픽셀을 전송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1983년부터 1990년 은퇴할 때까지 MIT의 어드밴스드 텔레비전 연구 프로그램(Advanced Television Research Program) 책임자였던 윌리엄 F. 쉬라이버 등은 인터레이스 장비에 대한 지속적인 옹호는, 인터레이스 장비에 하였던 상당한 투자를 회수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는 소비자 전자제품 회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디지털 텔레비전 전환은 200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전 세계 모든 정부는 2010년대까지 아날로그 폐쇄 기한을 정했다. 처음에는 채택률이 낮았다. 그러나 곧 점점 더 많은 가정이 디지털 TV로 전환했다. 전환은 201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스마트 텔레비전
디지털 TV의 출현은 스마트 TV와 같은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커넥티드 TV 또는 하이브리드 TV라고도 하는 스마트 TV는 인터넷과 웹 2.0 기능이 통합된 TV로 컴퓨터와 TV 및 셋톱박스 간의 기술 융합의 예이다. 전통적인 방송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텔레비전 세트 및 셋톱 박스의 기존 기능 외에도 이러한 장치는 인터넷 TV, 온라인 양방향 미디어, OTT 콘텐츠, 주문형 스트리밍 미디어 및 홈 네트워킹 액세스도 제공할 수 있다. 이 TV에는 Android 또는 그 파생물인 Tizen, webOS, Roku OS 및 SmartCast를 포함한 운영 체제가 미리 로드되어 있다.
스마트 TV를 인터넷 TV, IPTV 또는 웹 TV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인터넷 텔레비전은 전통적인 시스템(지상파, 케이블 및 위성) 대신 인터넷을 통해 텔레비전 콘텐츠를 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인터넷 자체는 이러한 방법으로 수신되지만). 인터넷 프로토콜 텔레비전 (IPTV)은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사용하기 위한 새로운 인터넷 텔레비전 기술 표준 중 하나이다. 웹 텔레비전 (WebTV)은 인터넷 TV에서 방송하기 위해 다양한 회사 및 개인이 만든 프로그램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디지털 또는 아날로그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 처리 시스템과 연결된 "지능형" 텔레비전 시스템에 대한 첫 번째 특허가 1994년에 제출되었으며 다음 해에 연장되었다.[139] 데이터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것과는 별도로 한 가지 핵심 포인트는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필요한 소프트웨어 루틴을 자동으로 다운로드하고 요구 사항을 처리하는 기능이다. 주요 TV 제조사들은 2015년에 중급 및 고급 TV용으로만 스마트 TV 생산을 발표했다.
3D 텔레비전
입체로 볼 수 있는 3D 텔레비전은 1928년 8월 10일 런던의 133 Long Acre에 있는 회사 구내에서 존 로지 베어드에 의해 처음으로 시연되었다. 베이드는 전자 기계 및 음극선관 기술을 사용하여 다양한 3D 텔레비전 시스템을 개척했다. 최초의 3D TV는 1935년에 생산되었다. 2000년대 디지털 TV의 등장은 3D TV를 크게 향상시켰다. 3D TV 세트는 Blu-ray 디스크와 같은 3D 홈 미디어를 시청하는 데 꽤 인기가 있지만 3D 프로그램은 대중들 사이에서 크게 실패했으며, 2010년대 초반에 시작된 많은 3D TV 채널은 2010년대 중반까지 폐쇄되었다.
텔레비전의 개척자
만프레드 폰 아르덴
존 로지 베어드
앨런 블럼레인
발터 브루흐 (PAL 방식 텔레비전)
기예르모 곤살레스 카마레나
앨런 아치볼드 캠벨-스윈튼
칼 페르디난드 브라운
알렌 B. 듀몬트
필로 T. 판즈워스
보리스 그라보브스키
찰스 프랜시스 젠킨스
1923년 뢰베 사의 설립자인 지그문트와 다비트 뢰베
얼 먼츠
파울 고틀리프 닙코프
콘스탄틴 퍼스키
보리스 로징
율리세스 아르망 사나브리아
데이비드 사르노프
아이작 쇤베르크
다카야나기 켄지로
레옹 테레민
티하니 칼만
블라디미르 즈보리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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