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영완을정좌 산서삼 괘화 노균감청신
영 : 영조(1724~1776)
완 : 완론탕평(탕평교서 탕평파 조제보합)
을 : 을사환국(1725 노론 재집권)
정 : 정미환국(1727 소론 온건파 재집권)
좌 : 이인좌의 난(1728 영조정통성 부정 소인 완전 몰락)
산 : 산림부정
서 : 서원철폐
삼 : 삼사축소(이조전랑 한림회천권 자천권 통청권 폐지)
괘 : 나주 괘서 사건(1755 간장게장사건)
화 : 임오화변(1762 사도세자)
노 : 노비종모법(1731)
균 : 균역법(1750 감포론)
감 : 노비공감법(노비 신공 감면)
청 : 청계천 준설(임금요역제)
신 : 신문고 부활(병조 1771)
1. 영조(1724~1776)
영조는 조선후기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다. 나아가 균역법실시 등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안정을 통해 민심을 추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후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호는 구리시에 있는 원릉이다.
2. 완론탕평(탕평교서 탕평파 조제보합)
완론(緩論)이란 특정한 정치 사안이나 문제에 대한 부드럽거나 완만한 논의 또는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던 정파(政派)를 지칭한다. 조선시대 붕당 형성 이후 완론은 기본적으로 붕당의 의리보다는 붕당 세력을 조정하여 화합하려고 하던 정치 집단이다. 탕평론이 대두하면서 완론은 탕평론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다. 반대되는 용어는 준론이다.
동인·서인이 분당된 이후 주로 완론과 준론으로 입장을 나누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완론은 심지어는 역적을 비호하는 논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준론이 특정 당파의 정치 의리를 고집하는 반면 완론은 붕당 세력 간의 조정을 급선무로 하였다.
경종 연간 신임옥사를 거치며 집권 세력이었던 소론은 노론의 처리 문제와 남인의 진용(進用)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이 나뉘었다. 노론에 대해 강경한 처벌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이 급소(急少)로, 노론의 처벌 대상을 주모자로 한정하자는 주장과 함께 급소의 맹주인 김일경(金一鏡)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 완소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 구도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던 세력들이 준소로 분류되었다. 완론 계열인 완소에는 조문명·송인명·서명균·박사수 등이 포함되었다. 영조 즉위 직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소론에 대한 토역(討逆)으로 정국이 혼란하자, 영조는 노론 세력을 축출하고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소론 세력 내 완론 계열인 조문명과 송인명 등을 발탁하여 중용하였고, 노론 세력 내의 완론인 홍치중이나 김흥경, 김재로 등을 함께 발탁하여 탕평파를 육성하였다. 따라서 영조대 탕평파는 완론 계열에서 주도하였다. 이들 완론들은 붕당론에서 붕당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하는 방식을 부정하고, 의리를 조정하고 인재를 고루 뽑아 조화를 이루는 조제보합(調劑保合)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완론 중심의 탕평당은 영조대 후반 척신 계열로 대체되었으며, 이에 대한 비판으로 준론을 주도하는 청명당이 결성되었다. 정조 즉위 이후 완론 계열은 약화되고 준론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3. 을사환국(1725 노론 재집권)
을사환국은 조선 후기 1725년(영조 1)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소론 측의 무고라 판정한 처분을 말한다. 영조 즉위 직후 정국은 경종대에 이어서 여전히 소론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주도권은 잠시로, 1725년 1월 영조는 소론들을 축출하고 노론으로서 정국을 구성하였다. 이를 을사환국(乙巳換局)이라고도 한다. 환국 직후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를 무옥으로 판정한 을사처분을 발표하였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자, 왕세제로 있던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국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721년(경종 1)과 1722년(경종 2)에 있었던 신임옥사로 많은 화를 입은 노론에게 자신들이 지지했던 영조의 즉위는 재집권의 기회였다.
영조는 즉위 직후 소론의 이광좌(李光佐)와 유봉휘(柳鳳輝), 조태억(趙泰億)을 삼정승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 노론의 영수격인 민진원(閔鎭遠)을 선왕후, 즉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동기라 하여 특별히 석방하였다. 민진원의 석방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노론 세력의 재진출을 위한 포석이었다. 경종 국상의 공제(公除) 직후인 1724년(영조 즉위) 11월 초,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이 왕의 구언에 응한 상소를 올리면서 소론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동학(東學) 훈도(訓導) 이봉명(李鳳鳴)을 비롯해 경기 유학 최보(崔補) 등 노론 측 인사의 소론에 대한 공격 상소가 계속되었다. 국왕은 일단 소론의 요구를 들어 이의현을 절도에 원찬하면서 동시에 왕의 특명으로 붕당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소론을 대표하던 김일경(金一鏡)을 삭직, 그날로 바로 절도에 안치하였다. 이의연과 김일경을 같이 처벌하는 방식은 영조가 탕평을 위해 취한 정치운영술인 양치양해(兩治兩解)를 현실에 적용한 첫 사례였다. 뒤 이어 임인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목호룡(睦虎龍)을 김일경과 함께 참수하였고, 이의연도 옥중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 1월 승지 윤봉조(尹鳳朝)가 상소를 올려 소론 측 삼사(三司) 관원에 대한 처벌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소론 측 관원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능에 행행할 때 패초(牌招)를 어겼다는 이유로 소론의 이조참의 조원명(趙遠命)을 파직하고 윤봉조에게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는 환국의 시작이었다. 이어 노론 측 인원들이 진출하였는데, 민진원을 이조판서로 삼아 그동안 축출되었던 노론 측 관원을 대거 등용하였다. 얼마 후 정호(鄭澔)와 민진원, 이관명(李觀命)을 정승으로 삼아 노론 정권을 구성하였다. 같은 해 3월 정호와 민진원의 요청에 따라 신임옥사를 소론에 의한 무고로 판정하고, 이로 인해 죄를 입은 사람을 일체 신원하는 이른바 을사처분을 단행, 노론 명분의 정당성과 집권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을사환국과 이어지는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하게 된 노론은 소론에 대해 보복 공격을 하였고, 이로 인해 정국이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에 영조는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 다시 노론 측을 축출하고 소론 측 인사들을 재등용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상했던 탕평의 추진을 위해 탕평파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4. 정미환국(1727 소론 온건파 재집권)
정미환국은 1727년(영조 3)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하여 정국을 변환시킨 사건을 말한다. 영조는 즉위하면서부터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통감하고 송인명(宋寅明)·조문명(趙文命) 등의 말을 들어 탕평책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사건은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측에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서 발단하였다. 먼저 이의연(李義淵)이 지난날 세제(世弟 : 뒤의 영조) 건저(建儲)를 주장하다가 처벌된 신하들을 신원(伸寃)하자고 성급하게 청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귀양을 가고 말았다. 또한, 송재후(宋載厚)는 김일경(金一鏡)이 대찬(代撰)한 임인옥사에 대한 교문(敎文)의 초고(草稿) 중 3건의 문구를 들어 “세제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하였다. 3건의 문구란 종무(鍾巫 : 魯桓公子 翬가 형을 죽인 것)·사구(沙丘 : 진시황의 맏아들 扶蘇를 죽이고 작은아들 胡亥를 세운 것)·접혈(蝶血 : 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로 모두 영조에 관련된 것으로서 소론 김동필(金東弼)도 그의 불온함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이 김일경의 교문문제에 대한 상소는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국했고, 김일경은 끝내 불복해 처단되었다. 또한, 임인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문구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는데, 이 때 와서 김일경과의 공모혐의로 국청(鞫廳)에서 심문을 받다가 불복하고 죽었다.
영조는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인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한 뒤, 경종 1년 김일경이 노론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한 신축소(辛丑疏)에 연명한 이진유(李眞儒) 등 6인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잇단 소론대신들에 대한 논핵으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우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의 소론대신들이 쫓겨나고 대신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 노론이 소환되어 조정에 들어섰다. 노론이 정권을 잡자, 신임사화 때에 처단된 노론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어 시호를 받았다. 정호·민진원 등 노론측은 《임인옥안 壬寅獄案》을 번안(飜案)해 당시에 자복한 사람들까지 신원했음에도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계속 고집하였다. 영조는 당습(黨習)을 꺼려 무욕(誣辱)을 밝히고 원통한 것을 풀어주면 그만이지 보복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1727년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영조 1년에 파면했던 이광좌·조태억을 기용해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참여시켰다. 이 해가 정미년이기 때문에 ‘정미환국’이라 한다.
이 결과 탕평파인 지평 조현명(趙顯命)은 신임사화 때 남형(濫刑)을 많이 저지른 것은 소론의 잘못이고, 영조 즉위초에 보복에만 급급했던 것은 노론의 잘못인데, 노론과 소론을 공정하게 등용하지 않음은 잘못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성립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번안된 《임인옥안》 문제를 들고 나와 영의정 이광좌, 대사헌 김시환(金始煥) 등이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전일의 죄명을 모두 씻어주고 관작만을 삭탈하는 선에서 일단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영조 4년에 일부 소론과 남인의 과격분자들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교체를 기도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영조는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해 당쟁을 조정하고 폐해를 막으려는 탕평책을 펴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점차 노론이 조정에 들어오고, 영조 17년에는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영조는 친히 〈대훈 大訓〉이라는 글을 지어 종묘에 고하는 한편 나라 안에 반포하였다. 이와 같이 《임인옥안》을 놓고 번복을 거듭한 것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5. 이인좌의 난(1728 영조정통성 부정 소인 완전 몰락)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고 경종 보호를 구실로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은 문책을 받아 정권에서 배제됐다. 이에 소론 과격파는 경종 사인에 대한 의혹제기와 영조가 숙종의 적자가 아님을 명분삼아 모반을 정당화하고 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난은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성을 향해 북상하던 반군은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영·호남의 호응 세력도 지방군에게 소탕되면서 진압되었다.
조선 경종(景宗) 연간에 소론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肅宗)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熾盛),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온의 4세손인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정희량의 난이 진압된 후 하동에서는 이명근(李命根)이 정희량의 반군과 연결되어 괘서에 동참하였다는 경상우병사 이여적의 장계가 조정에 이르렀다. 이명근은 1728년 6월 국청에 잡혀와 국문을 당하였고, 이듬해 반군에 동참하였음을 자복하였으며 형장을 맞아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1930년에 간행된 『하동지속수(河東誌續修)』에는 무신의 난 진압 후 양무공신(揚武功臣) 녹권에 참여한 인물로 김중원(金重元)·정만욱(鄭萬旭)·조영하(曺永河)·서명창(徐命昌)·신경섭(申景涉)·김석후(金碩垕)·김성준(金聖駿)·서선원(徐善遠)·서상항(徐尙恒)·강여주(姜汝柱) 같은 하동 지역의 인물이 재록되어 있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 노론의 권력 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 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졌다. 한편 영조 즉위 초부터 주창되어 온 탕평책의 실시는 그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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