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 정준하 장규초 수해정박
정 : 정조
준 : 준론탕평
하 : 박지원의 열하일기(패관소품체)
장 : 장용영(왕 호위부대) 설치
규 : 규장각 설치
초 : 초계문신제
수 : 수원화성
해 : 신해통공
정 : 정유절목(1777 서자 관직 허용)
박 : 신해박해(윤지충)
1. 정조(1776~1800)
정조는 조선후기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76~1800년이며,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이다.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다.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다.
2. 준론탕평
정조대 정국운영에도 영조대처럼 탕평이라는 원칙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동시에 정조대 탕평은 영조대의 탕평정국을 비판하면서 출발하였다. 비판의 기본 관점은 사림세력의 정치원칙인 의리문제를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권력자에 그저 추종하는 무리들을 중심으로 당색을 갖추어서 함께 추천하고 구색을 맞추어 쓰면 된다는 互擧雙對를 진정한 탕평으로 착각했고, 이 때문에 이른바 蕩平黨 만의 탕평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결과는 당쟁의 폐단을 확대시키기도 했던 척신정치의 부활을 초래하였고, 척신들의 이해관계나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왕위계승권자의 위치도 함께 흔들리는 등의 폐해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 점을 군주인 정조는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국운영은, 사대부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이기도 한 ‘世道’ 전체를 타락시켰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완론계 정파 중심의 탕평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대의 탕평은 정치원칙을 존중하는 淸議·峻論을 지켜나가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 곧 진정한 의리에 바탕을 두는 탕평이 그 출발부터 전면적으로 표방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타락한 세태를 이상적인 시대의 수준으로까지 회복하게 한다는 挽回世道를 시대적인 표방으로 내세웠다. 이는 영조가 표방했던 聖君政治論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또한 이미 영조 연간부터 존재해 왔지만 부차적 주장에 머물렀던 준론탕평론을 정조 연간에는 본격적으로 정국운영에 적용하겠다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동시에 영조대에 덜 존중되었던 주자성리학(宋學)적 실력을 보다 존중하는 바탕을 유지해서, 군주권이 보다 넓은 지반을 가지도록 강화하겠다는 선택이기도 했다. 준론탕평론은 의리의 변별을 보다 중요시하지만, 붕당의 타파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긍정하는 견해이다. 곧 이를 모두 이룰 수 있는 의리로써 조제하여 인재를 보합하자고 함으로써, 탕평의 근본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조 연간 노론 준론계의 핵심적 지도자였던 李天輔는 다음과 같이 사림정치의 기본 원칙인 義理와 사대부로서의 명예와 지조인 名節을 모두 지켜내면서, 동시에 붕당의 타파를 병행하는 방법을 찾아서 추진하자고 했다.
정조대 노론계 집권 주류에 이어지는 선배 정치가였던 兪拓基도 소론계 李宗城과 연합해서 척신정치에 대항하면서, “그 사람이 가진 의리가 옳으냐가 중요하므로, 그 사람이 가진 당파 색깔은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재야 학자로 머물렀던 성호 李瀷도 탕평의 핵심은 치우치지 않는 데 있다고 하면서, 이는 품성과 기질이 전혀 다른 북쪽 연나라 사람과 남쪽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갈 수 있다거나, 친족과 풍습이 다른 부부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므로, 뜻과 지력을 모아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탕평이 안되는 근본 원인은 ‘貴勢子弟’ 곧 양반문벌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론탕평론은 정조 연간 남인 계열의 유력한 정치지도자였던 丁範祖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는 人心이 각각 다르지만 조화시키면 하나가 되듯이 黨心이 각각 대립되지만 조화시키면 나라를 잘 이끌게 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요컨대 전근대 성리학적 사회의 정치원칙인 의리에 준엄한 인물들의 원칙을 조제하고 인재를 보합하는 데 이르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완론탕평론과는 환국 형태의 정국운영을 부정하는 입장과, 군주권 강화와 관료제 강화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정조 연간에는 영조 47년(1771) 전후에 淸流를 표방하면서 출발했던 노론 淸名黨에서 이어진 金鍾秀·尹蓍東 계열, 경종 2년(1722) 전후에 새로이 출발했던 淸南에서 이어진 蔡濟恭 계열, 峻少(少論 峻論)에서 이어진 徐命善·李福源 계열의 소론계 정파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영조대에는 당색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두 외척세력의 정치간여를 비판하는 정파였다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곧 외척 및 그들과 밀착된 특권적 정치집단의 정국 주도를 배척한다는 기본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정조 연간에는 이들에서 이어진 정치집단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들의 의리 주장이 정치 원칙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면서 탕평책 아래에서 조제되었다.
특히 정조는 영조 말년 척신세력의 전횡으로 야기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그후 왕세손일 때도 대리청정 전후시기에 척신계의 방해로 곤경에 처했던 사태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즉위 후 외척세력의 배제를 정치의 첫째 원칙(의리)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사림정치의 기본원칙과도 일치하고 있으므로, 사림계의 淸議를 존중하는 준론계 정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갔던 것이었다. 그래서 즉위 초에 영조 연간 정국을 주도했던 南黨(金龜柱 계열)·北黨(洪鳳漢 계열)으로 불렸던 외척당 세력을 모두 와해시켰다. 또한 자신의 즉위 공신인 洪國榮이 척신정치를 기도하자, 아무도 예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계를 은퇴하게 했다. 이후에도 즉위 공신인 鄭民始나 李命植들은 최고 정책 결정권을 가지는 相臣으로는 임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3. 박지원의 열하일기(패관소품체)
『열하일기』는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이 청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이다. 총 26권 10책이며 필사본이다.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을 축하하기 위해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경과 황제의 피서지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작성했다. 청조 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견문하고 그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로, 북학에 대한 주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하여 조선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4. 장용영(왕 호위부대) 설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1785년(정조 9) 자신의 경호 부대로 설치된 장용위(壯勇衛)를 모태로 하여 1793년(정조 17)에 규모를 확대하여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그는 문반의 핵심 관료들을 규장각에 모아 두뇌 집단으로 삼고, 권력 유지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를 장용영으로 개편하여 친위 부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왜란과 호란 이후 군사 제도로 정립된 5군영은 실질적으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영 운영에 전권을 가지고 있는 군영대장의 임명 역시 국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다. 각 군영의 인사권은 군영 내에서 1명을 추천하면 병조에서 승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병조의 인사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정조는 이를 개선하여 3명을 추천하여 이 중 1명을 병조에서 임명할 것을 1785년(정조 9) 『대전통편』 내에 법제화시켰다. 그리고 1788년(정조 12)에 훈련도감이 군영대장과 무관(武官)의 승진과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도 개선할 것을 지시하였다. 훈련도감이 아닌 병조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군영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인사권을 가진 고위 무관들이 대체로 노론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군영의 체제나 인사권 제도 개선만으로 군권을 장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조의 친위 군영 설치는 1777년(정조 1) 궁궐의 정조 처소인 존현각(尊賢閣)에 자객 침입 사건이 일어나면서 명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호위 부대인 1777년 11월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했으며, 이는 뒤에 장용위, 그리고 장용영 설치로 이어졌다. 정조는 기존 5군영의 군사를 장용영에 이속시킴으로써 5군영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장용영 설치에는 양란 이후 2백 년간 지속된 평화기로 문치주의의 극성기가 되자 사회가 전반적으로 문약해짐을 경계하는 뜻도 작용하였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었다. 내영은 서울의 본영으로 지휘관을 장용사, 장용영대장으로 불렀다. 규모는 기존의 군영보다 크게 확대하여 5사(司) 25초(哨)로 하였다. 외영은 수원 화성(華城)에 두어 5천 명의 병마를 주둔시켰다. 다음으로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 등 다섯 읍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영에 소속시켜 지역 공동 방위군인 협수군(協守軍)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정조는 문무 핵심 친위 기구를 조직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장용영은 단지 국왕을 호위하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과 화성 행궁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와 기존 군대 개혁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 사후 곧바로 정조의 개혁 사업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혁파되어 재정과 군사력은 모두 기존의 군문으로 환원되었다.
5. 규장각 설치
규장각은 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정조 즉위)에 창덕궁 후원에 세워진 건물이다. 그러나 이미 1464년(세조 10)에 양성지(梁誠之)가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사실이 있고, 1694년(숙종 20)에 규장각이라는 명칭으로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는 전각이 잠시 쓰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정조는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간다는 ‘계지술사(繼志述事)’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규장각을 설치한다고 천명하였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국왕 중심의 탕평 정국을 이끌기 위한 공간으로 규장각을 창설하였다.
규장각은 설치 초기 국왕의 글과 글씨 보관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을 수집하고 편찬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왕실 도서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무엇보다 『일성록(日省錄)』을 편찬하는 일을 주관함으로써 중요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정조는 규장각의 업무를 담당하는 관원 선발에 심혈을 기울여 이들을 통해서 당쟁을 극복하고, 학술 진흥과 탕평 정치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였다. 신분을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규장각의 실무를 담당하는 검서관에 관직 진출이 막혀 있던 서얼을 등용하였다. 검서관은 국왕 가까이에서 서적을 편찬, 간행,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규장각 주관하에 과거에 급제한 연소한 관리 중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선발하여 규장각의 각신으로 하여금 초계문신의 교육과 시험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외에도 규장각 관원들은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학술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정조의 특별한 관심 속에 있었던 규장각 관원들은 우월적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특혜를 받은 만큼 정해진 규정에 엄격히 따라야 했다.
규장각을 통해 이뤄내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은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이라는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규장각은 정조 재위 기간에는 인재 양성의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하지만 정조 사후 세도 정치기에 들어서면서 약해진 왕권 속에서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어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6. 초계문신제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친위 세력을 양성할 목적으로 학문 기관인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규장각 요직인 제학(提學)과 직제학은 홍문관 및 예문관의 당상관 중에 이조(吏曹)에서 후보자를 올리면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 정조는 각신(閣臣)을 임용하여 친위 세력을 구축한 데 이어서 지속적으로 친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1781년(정조 5)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였다.
초계문신 제도는 과거에 급제한 참상관(參上官)⋅참하관(參下官) 가운데 37세 이하 문신들을 선발해 40세가 될 때까지 재교육하는 것이다. 이때 규장각 각신들이 교육과 시험을 전담하였다. 초계문신의 교육 과정은 경전류(經典類)를 강론하는 시강(試講)과 시강을 바탕으로 제술문을 짓는 시제(試製)로 나뉜다. 이들은 유교 경전이 갖고 있는 원래의 깊은 뜻을 깊이 있게 탐구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통치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정조의 뜻에 부합하여야 했다.
1781년(정조 5) 처음 시작된 초계문신 선발은 정조가 사망하는 1800년(정조 24)까지 10회에 걸쳐 실시되었고 이때 선발된 인원은 총 138명이다. 초계문신 중 각신으로 진출한 사람은 18명이며, 정조 사후 초계문신을 거쳐간 인재들이 19세기의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정조는 초계문신 교육 성과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장려책을 마련했으며, 여러 가지 특권도 주었다. 또 정조는 초계문신 교육에 대단한 열성을 기울이며 그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몸소 시험장에 나와 시험 과정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는 친시(親試)였다. 이때 초계문신들이 작성한 시무(時務)에 관한 계책을 담은 책문(策問)이 상당수에 이른다.
7. 수원화성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8. 신해통공
신해통공은 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의 건의로 시행된 통공발매정책이다. 조선 후기에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비시전계 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한 상업정책이다. 노론계열의 벌열과 연결되어 있던 시전 상인들은 특권적 금난전권을 수단으로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이로 인해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영조 때부터 금난전권 폐지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정조 때 시행되었다. 이로써 도시 내 일반상인들은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었고 이는 상업 발전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신해통공은 신흥상인자본이 시전제도와 같은 보수적 · 특권적 · 봉건적 상업조직의 구각을 타파하고, 당시 사회경제적 요구를 관철하여 상업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봉건정부가 종래의 특권적 시전 체제로서는 새로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인(私商人)의 활동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는 한계에 달했음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는 준론(峻論 : 淸流를 자처하며 사대부의 의리와 명예 및 절개를 숭상하려는 노론계의 논리) 중심의 탕평책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 아래 진행된 경제개혁 정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을 통해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및 소생산자가 보호받을 수 있었고, 상업의 발전이 촉진되어갔다.
9. 정유절목(1777 서자 관직 허용)
1. 요직을 허통시키는 것은 문관의 참상(종6품)인 것으로 호조, 형조, 공조를 말한다.
2. 문관, 무관의 당하곤은 부사를 상한선으로 한정하고, 당상관은 목사로 한정한다. 음관의 생원, 진사 출신은 군수를 허락하며, 그 가운데 치적이 있는 자는 부사를 허락한다.
3. 문신의 분관은 운각(교서관)으로 한정하는데 직강 이하의 자리는 아울러 구애받지 않는다. 무신으로서 도총부와 훈련원 부정은 거론하는 것이 부당하지만, 중추부는 구애받지 않는다.
4. 오위장은 문관, 무관, 음관의 당상은 아울러 구애받지 않으며, 무신으로서 우후를 지낸 사람은 같은 예로 대우한다.
- 특별조항
1. 조선은 문벌을 숭상하고 있으므로 같은 서류라도 그의 본종의 가세에 따라 차등을 둔다.
2. 서얼이 벼슬길에 나온 뒤 적손의 무리가 잔약하게 되어 명분을 괴란시키는 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서얼이 적자를 능멸한 율로 다스린다.
3. 외방의 향임인 경우 수임首任 이외 여러 직임은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참용시킬 것을 허락한다. 만일 무지하여 분수를 범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야료를 부리는 폐단이 발생할 경우에는 해도에서 드러나는 대로 엄중한 법으로 용서없이 다스린다.
10. 신해박해(윤지충)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1791년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尹持忠) 집안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의 문제가 일어났다.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的)인 잠정적 변법(暫定的辨法)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당시의 이 기율적 변법에 터전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은 그의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 않고 천주교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다.이 때문에 윤지충은 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으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 때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權尙然:윤지충의 인척)이 그를 옹호하고 나서 문제는 더욱 소란해졌다.
진산에서의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공서파(攻西派:천주교를 공격하는 세력)는 신서파(信西派:천주교를 신봉 또는 묵인하는 세력)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서서 이 일을 정치문제로 확대시켰다. 공서파는 폐제분주는 전통적 유교사회의 제례질서를 파괴하는 패륜(悖倫)이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효·불충이라고 잇따라 상소를 올려 신서파를 공격하며 정조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도 사태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어 마침내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으로 하여금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문초하게 하였다. 윤지충은 조상제사는 허례이며 진정한 조상추효(祖上追孝)의 방법이 아님을 항변하였으나, 결국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되었다. 사건은 그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진산사건은 한국천주교 내외에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사건인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천주교회는 밖으로부터 전도의 사명을 띠고 한반도에 들어와 전교활동을 펴는 선교사의 활동 없이 쇄국 조선의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에 의하여 창립된 교회였다. 즉, 서학(西學)이라는 학문활동으로 천주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창설된 교회였다.
그들 전통적 유교지식인들은 17세기 초부터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부연사행원(赴燕使行員)들에 의하여 도입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의 접촉과 연구를 통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 이해에 터전하여 천주신앙을 얻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의 도리가 유교의 그것과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현세당위론적인 선(善)의 추구를 전지전능의 천주와 연결지어 이해하였고, 내세(來世)와의 연관에서 파악하고 천주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이제 신해진산사건으로 그들이 믿고 있던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라는 처지에 한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조상제사 문제에서 지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보유론적 천주신앙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교의 전통적 가치체계로 후퇴하거나,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적 가치체계를 숭봉하느냐를 택하여 하나의 결정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어려운 결정의 시기에 탈락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새로운 결심에서 신앙생활의 새 경지로 매진하는 교인도 많았다. 이 시련을 통하여 한국천주교회는 보유론적 천주이해라는 초기신앙 형태의 문화주의적 종교신앙에서 순수한 천주신앙으로 접어들게 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제2의 장이 열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공서파는 천주교회에 대한 공격을 더욱 날카롭게 하게 되고,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구실을 조상제사의 거부라는 데서 명목을 찾게 되었다. 이 논리는 이후 100여 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이유로 십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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