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붕당사 두문자 : 경기갑병신좌 서남소노소노

by noksan2023 2023. 8. 14.
반응형

붕당사
붕당사

 

붕당사 : 경기갑병신좌 서남소노소노

 

경 : 신환국

기 : 사환국

갑 : 술환국

병 : 신처분

신 : 임사화

좌 : 이인의 난

서 : 

남 : 

소 : 

노 : 

소 : 

노 : 노론

 

 

경신환국 : 기름천막사건
경신환국 : 기름천막사건

 

1. 신환국

경신환국이라 함은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을 말한다. 1680년(숙종 6) 3월 시작된 경신환국(庚申換局)은 당시 집권당이었던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에게 축출당한 정치적 사건을 말하며,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한다. 환국이란 갑작스럽게 정국이 바뀐다는 뜻으로, 역사적 용어로는 숙종 대에 일어난 경신환국,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을 지칭한다. 환국은 정파 간의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존의 정치질서가 무너진 상태에서 어느 한 당파가 정국을 좌우하게 되는 상황을 상정하기 때문에 남인과 서인간의 연립정권이 운영되었던 앞 시기와 비교할 때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특히 숙종 연간의 정치상황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붕당간의 이념・정책 대결이 심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일제시기 식민사관에 의해 ‘당파성론’을 언급하는 주요 증거로 활용되었다. 붕당정치의 긍정적 의미와 성리학적 정치이념에 대한 이해 수준의 심화로 현재는 식민사관이 많이 극복되었으나, 여전히 환국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영조(英祖)와 정조[조선](正祖) 대의 탕평정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배경을 제공하는 기재로 설명이 된다. 즉 붕당간의 대결이 극심해지면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하는 캐스팅보트를 국왕이 쥐게 되었고, 자연스레 군주의 성인적 면모와 능력에 의지하는 탕평정치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국을 붕당정치론의 연장선에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경신환국의 경우 왕실 또는 국왕의 권위확립의 차원, ‘훈척’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 등의 변수를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환국의 시기에는 붕당정치의 틀로만은 수용할 수 없는 다양한 정치 현상이나 정치 집단들이 등장한다. 또한 환국을 기존의 설명대로 붕당정치의 이상 속에서만 평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붕당간의 치열한 이념 대결의 양상은 현대의 가치로 평가하면 집권욕으로만 비추어져 부정적이지만, 당대 사대부들의 관념상으로는 정치 이념과 이에 따른 정책과 시무의 대결이므로 붕당정치의 쇠퇴기나 변질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송에 초점을 두어 정국을 설명하면 남인과 서인의 구도로 당시의 정국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당시 정국은 단순히 붕당간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때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을 나눠보면 송시열과 송준길을 중심으로 하여 이유태(李惟泰),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산당(山黨), 김좌명(金佐明)과 서필원(徐必遠), 이경석(李景奭), 정태화(鄭太和) 등의 한당(漢黨), 원두표(元斗杓), 이후원(李厚源), 이시백(李時白) 등의 대신들을 위시한 일반 관료군, 허적(許積), 오정창(吳挺昌) 등의 남인계 관료군 이렇게 4개의 세력이다. 이러한 세력 구성에 포함되지 않는 또 하나의 정치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왕실과 가까운 종실세력과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 세력이었다. 숙종은 어릴 때부터 ‘삼복(三福)’이라 불렸던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을 총애했기 때문에 이들은 종친임에도 정국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외가인 남인인 오정창(吳挺昌) 형제들, 외척인 청풍부원군 세력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인 삼복은 청풍 김씨인 김육(金堉)이 인평대군의 묘지명을 써준 계기로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다. 김석주가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2차 예송 때에 남인을 지지한 이유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인계 관료인 허적도 이들의 배려 속에 출사를 하여 현종대 후반과 숙종대 초반의 정국을 남인 주도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따라서 숙종대 초반의 정국은 삼복 형제와 청풍김씨 외척, 남인 관료군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국이었다. 그런데 갑인예송의 여파로 송시열이 지나치게 수세에 몰리고 남인들이 큰 세력을 형성해가자, 외척 김석주 측은 남인들을 적절히 제어할 필요를 느꼈다. 숙종마저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서인 산당 계열을 다시 조정에 부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외척 세력은 남인 관료군들과는 물론 삼복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종친 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복창군과 복평군이 궐내에서 궁녀와 간통했다는 일을 김우명이 상소한 것이었다. 또한 숙종이 한때 병환이 있어 후사 문제를 두고 조정이 뒤숭숭할 때 호위군과 병권의 장악 문제를 두고도 외척과 종친 세력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1680년(숙종 6) 3월 19일 숙종은 허적의 조부인 허잠(許潛)에게 시호를 더하여 내려주는 것을 기념하는 잔치에 필요한 물품들을 넉넉하게 내려 주라고 명했다. 이날따라 비가 왔기 때문에 숙종은 배려하는 차원에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름을 친 천막을 보내주라고 했다. 그런데 숙종은 허적이 이미 허락도 받지 않고 왕실 물품인 유악을 먼저 가져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숙종은 크게 화가 났다. 숙종은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 신여철(吳始復)을 불러서 유혁연을 해임하고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총융사로 삼는 급작스러운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철원에 귀양을 가 있던 서인 인사 김수항을 사면하고 남인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을 파직시켰다. 더불어 그 동안 허적에게 쌓였던 불만들을 표출하며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붕당간의 화합에 힘쓰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였다는 비판을 하였다.

 

허적은 더 이상 정승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숙종의 불신임이었다. 숙종은 허적에게 사직을 권하였고, 마침내 허적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또한 같은 날 허적의 세력인 윤휴와 민암(閔黯)의 삭탈관작과 귀양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숙종은 별다른 지시 없이 허락을 하였다. 4월 3일에는 영의정에 김수항, 좌의정에 정태화, 도승지에 남구만(南九萬)을 임명함으로써 서인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삼복형제와 나머지 남인들에 대해서도 유배와 삭탈관작의 조처가 행해졌다. 약 보름에 걸친 이 일은 표면적으로는 숙종이 왕실을 가볍게 여긴 허적의 태도에 화가나 단행한 인사개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숙종의 정국 주도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서인계 인사들이 조정에 대거 진입한 뒤 정원로(鄭元老)에 의한 ‘삼복의 변’이 고변되었다. 그것은 삼복형제와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숙종이 지난 번 환후로 고생할 때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정원로에 따르면 허견과 삼복형제는 숙종이 병환을 앓는 와중을 틈타 도체찰사부 소속의 이천(伊川) 둔군(屯軍)을 특별히 훈련시켰다고 하였다. 도체찰사부는 현종 때에 필요성이 없다하여 폐지되었다가, 윤휴와 허적의 건의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이 기관에 통폐합시켜 군권을 일원화 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허적이 깊이 관여한 도체찰사부가 그의 아들의 역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허적의 죄는 물론 윤휴와 유혁연, 이원정 등 남인 관료들의 죄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허적이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숙종은 최종적으로 이들을 방귀전리(放歸田里), 위리안치(圍籬安置), 감사정배(減死定配) 하는 것으로 처분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사사되었다. 이 사건의 고발자는 정원로였으나 이 역모를 애초에 눈치 챈 사람은 김석주와 김만기 등의 외척세력이었다. 즉, 숙종 초년에 형성된 종친과 외척 세력의 균열이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드러난 것으로 경신환국에서 척신 세력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곧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의 분립이 진행된다. 그 중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송시열과 ‘삼척(三戚)’으로 불렸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연합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9년 뒤 다시 남인계의 후궁 장희빈이 낳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이 때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사사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는데, 경신환국으로 사사된 허적과 윤휴는 다시 복권된다. 그리고 다시 5년 뒤에는 장희빈이 사사되면서 갑술환국이 일어나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하게 된다.

 

 

기사환국
기사환국

 

2. 사환국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국 동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송(禮訟)이다. 현종 즉위 초의 1659년(현종 1) 1차 예송은 효종의 사망 이후 효종에 대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화두가 된 것으로 허목(許穆),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은 3년상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서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은 실각하여 허적(許積)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만이 참여하는 속에서 서인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예송이 다시 일어났는데,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이 예송에서는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송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숙종[조선](肅宗)은 강력한 왕권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숙종 초반은 2차 예송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7)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숙종 8)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르고, 계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무렵 숙종은 궁중 나인이었던 장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장씨를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며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급기야 1686년(숙종 12)에는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책봉하였다.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 있었다. 장씨의 종숙부인 장현(張炫)은 역관 출신으로 당대 재력가였다. 그는 경신환국 당시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 옥사에 연루되었던 혐의를 받고 유배를 간 경력이 있었다.

 

이처럼 장희빈은 남인 계열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서인계열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인계인 부교리 이징명(李徵命)은 “장씨는 장현의 친척이며, 장현은 복창군과 복선군에 빌붙은 자로 귀양을 간 인물인데, 그의 근족을 가까이 둔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함으로써 남인계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였던 인현왕후 대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서인계의 불안은 숙종의 뒤이은 조치로 더욱 증폭되었다. 왕자가 출생한지 석달도 안된 시점에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숙종은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지금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서 명호를 정하려 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바치고 물러가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난색을 표하며, 다른 날 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이를 반대한 인물들은 서인 노론계의 관료대신으로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해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이었다.

 

 

인현왕후 vs 장희빈
인현왕후 vs 장희빈

 

 

숙종은 서인 노론계의 우려를 뒤로 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 숙종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 서인계열은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여 국가의 화가 조석에 미칠 것이다.”라고 두려워할 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1일 송시열이 국왕에게 올린 소는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송시열은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송(宋) 때의 일화를 언급하였는데, 철종(哲宗)은 10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는데, 제왕은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왕자의 원자 칭호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자 숙종은 명 황제는 황자를 낳은 지 4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의 예를 들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 태자 책봉을 싫어하는 뜻이 강하고, 그 뜻을 조작하고 설계한 것은 더욱 위험하다.”고 분노하였다. 이 송시열의 상소는 서인들의 일망타진을 노리던 남인과 숙종에게 호재로 작용하였다.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 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 사건은 서인에서 남인 정국으로의 변화 환국을 의미하였고, 남인이 다시 집권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어 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목창명(睦昌明)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윤휴를 비롯하여 경신환국에서 화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신원되었다. 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다. 숙종은 이 외에도 서인에 대해 가혹한 응징의 조처를 단행하였다.

 

그 첫 번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출향이었다. 숙종은 두 신하를 종향하자는 논의는 50년간 지속되었지만 선왕도 윤허하지 않았고, 선비의 국론이 정하여지지 않아 무고가 많고, 모욕하며 투기하고 이간하는 계책이 많아 국가가 혼란스러운데, 단지 한때의 숭상하는 것만을 쫒아서 하였던 것은 진정한 덕이 아니니, 출향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두 번째는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폐출한 것이었다. 숙종은 성종대 폐비 윤씨의 투기가 드러나자 성종이 종사를 위해 폐출을 단행하였던 사례를 들며 민씨는 윤씨보다 더하므로 폐서인 시키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는 일 등을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해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을 비롯하여 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결국 숙종은 폐비 문제를 주관대로 처리하였고, 1690년(숙종 16)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시켰다. 세 번째 송시열의 사형이었다. 당시 예조판서 민암, 권대운 등 남인은 송시열을 문외 출송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형을 적극적으로 촉구하였다. 그 결과 숙종은 같은 해 6월 송시열에게 사사의 명령을 내렸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돌아오는데, 중전을 폐한 것과 오두인과 박태보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먹지 않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남인을 재집권시켰으며, 동시에 남인은 서인에 대한 보복성 행위를 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상황이 역전이 되었을 경우에도 또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갑술환국 : 숙빈 최씨의 등장
갑술환국 : 숙빈 최씨의 등장

 

 

3. 술환국

갑술환국은 16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세자의 생모 장씨(張氏)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숙종대에서 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1674년 숙종이 즉위했을 때 제 2차 복제논쟁을 계기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집권한 갑인환국(甲寅換局), 1680년(숙종 6) 훈척계열의 김석주와 숙종이 협력하여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진출시킨 경신환국(庚申換局), 1689년(숙종 15) 숙종과 소의(昭儀)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의 위호를 정하는 일에 반대하던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진출한 기사환국(己巳換局), 다시 장씨가 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며 남인이 실권한 갑술환국(甲戌換局) 등이 그것이다. 환국 정치의 시기에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서로에 대한 비판이 정도를 넘어 서로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정치인들 간에 상호 신뢰에 바탕한 조화의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운영에 제동을 걸며 당파 간의 지나친 경쟁을 자제하고 더 큰 정치적 목표 아래에서 서로 협조하는 정치 문화를 지향한 것이 18세기의 탕평정치이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중심으로 한 서인 훈척 계열이 군사적 실권을 독점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석주는 군제 개혁을 주관하면서 금위영(禁衛營)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다. 군권을 장악한 이러한 훈척계열의 독주에 대해 삼사(三司)의 젊은 관료들은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682년(숙종 8) 남인 허새(許璽) 등이 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역모가 고발된 이후 증거가 불충분한 사건의 처리방향을 두고 훈척과 연소 신료들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서인계 관료와 지식인들은 각각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분화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간의 사제간 갈등이 이에 결부되면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이 성립되었다. 1688년(숙종 14)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 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1689년(숙종 15) 2월 노론계의 영수이자 산림인 송시열이 원자 정호(定號)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하는 동시에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계 인물들로 대체시키는 환국을 단행했다. 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숙종의 의지와 판단에 의한 것으로, 남인의 정치적 기반은 허약했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들은 서인 학문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을 문묘에서 출향하는 조치를 통해 서인들에 대한 보복을 시작하였다. 원자 정호에 반대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또 김수항(金壽恒), 이사명(李師命) 등 노론계 신료들과 김익훈(金益勳) 등 훈척 등 18명이 죽고, 서인계 인물들 다수가 정계에서 축출당했다. 인현왕후는 투기를 일삼는다는 이유로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흰 가마를 타고 요금문(曜金門)으로 나가 친정인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으로 돌아갔는데, 통곡하는 관리와 유생들이 길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하지만 남인 중심의 정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690년(숙종 16) 6월에는 3세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남인들의 정권이 안정에 접어드는 듯하였지만,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등이 진출한 남인 정권 아래에서 왕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관례를 뛰어넘어 총융사(摠戎使)로 발탁되고, 역관으로 막대한 재부를 이루고 있던 장씨 가문의 인물들은 과도한 사치로 눈총을 받았다. 1691년(숙종 17)에는 폐위되었던 인현왕후의 궁인이었던 최씨가 새로 후궁이 되는 등 왕실 내부의 여건도 남인 정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에 일어난 두 고변 사건으로 다시 정국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1694년 3월 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나 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의 고변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국청의 조사결과 이 고변은 허구로 지어낸 것으로 귀결되는 듯 했으나 다음 날인 4월 1일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출송 당했고 민암, 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4. 신처분

경인환국 뒤 5∼6년간은 여전히 관료 성향의 노론과 소론이 함께 정국 운영에 참여하여 균형을 이룬 형세였다. 그러한 균형은 숙종 40년(1714) 정월 尹拯이 죽으면서 최석정이 지은 그의 제문을 둘러싸고 대립이 날카로워지면서 깨어졌다. 윤증은 숙종 초년 노론과 소론의 분립 이후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 山林이었다. 최석정은 제문에서 송시열을 침해하여 배척하였는데 “空言은 몸소 실천하지 못하였고, 高論은 이루지 못하였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이에 대해 노론계의 성균관 유생들이 먼저 나서서 송시열이 내세운 청에 대한 復讎 大義를 공언과 고론으로 비방한 것이요, 효종을 무함한 것이라며 최석정을 극력 공박하였다. 이에 대해 숙종은 최석정의 제문은 공적인 문서가 아니므로 조정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답을 하였다. 그러나 노론측에서는 최석정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고, 소론에서도 이에 대해 반박을 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해졌다.

 이러한 노소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킨 것이≪家禮源流≫의 저작권 시비였다. 병자호란 직후 兪棨가 윤선거와 함께 家禮에 관한≪儀禮≫및 제가의 禮書를 정리하여≪가례원류≫라는 책의 初本을 만들어 이를 제자인 윤증에게 맡겼다. 이를 숙종 39년에 유계의 손자인 兪相基가 당시 우의정이었던 李頤命의 후원을 받아 간행하고자 하여 윤증에게 가지고 있는 中本을 달라고 하였으나, 윤증은 자신의 부친인 윤선거와 함께 만든 것이며 자신도 일부 보완하였는데 갑자기 간행을 이유로 달라고 하는데 의문을 품고 내주지 않았다. 이에 둘 사이에 분쟁이 생겼고, 유상기는 다른 데서 초본을 확보하여 책으로 꾸미면서 權尙夏의 서문과 鄭澔의 발문을 실었는데, 이들은 그 글에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고 책의 저작권을 고집함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유상기가 간행 작업을 마치고 숙종 41년 11월에 왕에게 올렸다. 이에 대하여 숙종은 儒賢인 윤증을 비난하였다 하여 정호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그의 발문을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 문제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 광범위한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해묵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懷尼是非 문제로 번져 갈등이 깊어졌다. 숙종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버지와 스승 가운데 아버지가 重하고 스승이 輕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윤증을 옹호하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노론계 인물들을 처벌하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창집을 좌의정에서 파직시키는 등 소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이러한 숙종의 지지에 힘입어 소론은 노론에 대해 더욱 압박을 가하면서 정국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론의 행태는 숙종의 불만을 사서 숙종 42년 7월 2일에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갈등의 단서가 되었던, 숙종 7년 윤증이 송시열의 무원칙한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여 보내려 했던 편지<辛酉擬書>와 송시열이 윤선거를 우회적으로 비난한 내용의 묘갈문을 모두 써서 들이라고 하였다. 숙종은 그 글을 검토한 결과 윤증의 말이 너무 송시열을 억누르는 것이 많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지는 것이 괴이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다. 숙종의 지지의 방향이 그 때까지 기울었던 윤증에서 송시열 쪽으로 바뀌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숙종은 이러한 판결을 내림과 동시에≪가례원류≫에 권상하의 서문과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으라는 조치, 송시열의 묘갈명에는 윤선거에게 욕을 끼친 바가 없다는 판결도 내렸다. 이어서 김창집을 좌의정으로 제배하는 것을 비롯해 노론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김창집은 8월 24일에 이르러 노론과 소론 각 붕당의 朝臣과 鄕儒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윤선거 문집의 인쇄 원판을 헐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윤선거가 남인 윤휴와 제휴하여 효종의 처사를 무함하였음에도 이 책이 소론측이 윤선거를 계속 비호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숙종은 즉석에서 이를 받아들여 윤선거 문집의 인쇄판을 헐어 없애라고 승정원에 명하였다. 더 나아가 노론계 인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윤선거와 윤증을 ‘先正’이라 부르는 것을 금하였고, 윤증의 서원을 새로 세우는 일을 금지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官爵을 追奪하는 데 이르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송시열이 엮고 그 제자 권상하가 수정한≪朱子大全箚疑≫17책을 校書館에서 간행하게 하였고, 송시열의 서원 華陽書院과 송준길의 興巖書院의 편액을 숙종이 직접 써서 내리기도 하였으며, 송시열의 문집을 교서관에서 간행하도록 허락하기도 하였다.

 좁은 의미에서는 숙종 42년(1716) 7월 2일 숙종이 윤증의<신유의서>에 허물이 있고, 송시열의 묘갈명에는 윤선거에게 욕을 끼친 바가 없다고 판결하고≪가례원류≫에 권상하의 서문과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으라고 한 조치를 丙申處分이라 하지만, 넓게 보면 그 이후 약 1년여 걸친 일련의 숙종의 조처를 아울러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병신처분으로 정국 주도 붕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정국 역시 급변하는 점에서 보면 이는 하나의 뚜렷한 환국으로서 이를 병신환국이라고 할 수 있다.

 병신환국은 해묵은 회니시비를 둘러싸고 심각해진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과 분쟁에 국왕 숙종이 직접 관여하여 처분을 내림으로써 발생하였다. 이로써 소론은 그 학문적·정치적 이념과 명분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소외된 반면 노론은 숙종의 인정과 지원을 받아 정국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은 상대방을 중앙 정국에 공존할 수 없는 상대로 보게 되었다. 병신환국 단계에서는 이미 죽은 윤선거와 윤증 그리고 송시열 등에 대한 사후 평가를 숙종이 처분하는 형태였기에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이 숙청과 죽음 등 극단적인 데로 치닫지는 않았다.

 윤증 부자의 관작을 삭탈한 지 두달쯤 지난 7월에 숙종이 관례를 무시하고 승지와 사관들도 배석하지 못하게 한 채 좌의정 이이명만을 불러 단 둘이 密談을 나누었다. 이른바 丁酉獨對이다. 이 때의 밀담 내용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독대 직후에 행판중추부사 이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이명 등 노론계 신료들만이 참여한 접견 자리에서 한 숙종의 언명에 따라 세자의 대리청정 문제였음이 알려졌다. 숙종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안질이 심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해야겠는데 무언가 뜻대로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언표를 하였다. 이에 대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당나라 및 세종이 문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조선의 고사를 들어 적극 찬성했고, 숙종은 그 날로 바로 하교를 내려 세자에게 대리정청을 명하였다.

 독대라는 비상한 절차에서 비롯된 대리청정 조치에 대해서 소론측에서는 노론측에서 세자를 위태롭게 만들려는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으로 의심을 하였다. 갑술환국 이후 줄곧 세자를 보호하는 데 공이 큰 것으로 인정받던 관료적 성향의 소론 영중추부사 尹趾完이 이이명을 私人·私身이라며 독대를 공박하였으나, 숙종은 윤지완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물리쳤다. 윤지완과 이이명 모두 성밖으로 물러가 대죄하였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독대와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찬반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가운데 세자도 여러 차례 대리청정을 극구 사양하였으나 결국 대리청정은 실시되었다. 이후 숙종 46년 6월 숙종이 죽을 때까지 약 3년간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투영하여 환국을 야기하며, 독대를 통해 대리청정을 하게 하면서까지 세자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 숙종의 처사는 대단히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각 붕당들은 제각기 是非와 正邪를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정치운영론을 진전시켰고, 그 결과 상대방을 부정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특히 숙종 사후에는 붕당 사이의 이러한 대립의 쟁점에 숙종의 뒤를 잇는 경종과 영조의 王位 승계문제까지 개입되어 忠逆을 다투는 상황으로 진전됨으로써 붕당 사이의 대립은 양보할 수 없는 싸움으로 발전해 갔다.

 

5. 임사화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의 분당 속에 노론이 1721년(경종 1, 신축) 김일경(金一鏡)의 상소로 축출된 후 다시 1722년(경종 2, 임인)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숙청당한 사건이다. 신축년(辛丑年)과 임인년(壬寅年)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신임사화라 하였다. 이는 사화의 피해자인 노론의 입장에서 서술된 용어이다. 신임사화로 노론의 주요 대신이었던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이 사사되었으며, 노론 가운데 유배를 당하거나 이 사건에 협조한 죄로 처벌받은 사람의 수는 200여 명에 달했다.

 

김일경의 상소를 계기로 시작된 노론 탄압은 1722년(경종 2) 3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당쟁사에 있어서 최대 규모의 당화(黨禍)로 확대되었다. 3월 27일 목호룡은 역적이 임금을 시해하려고 하며, 또 폐출(廢黜)을 모의한다고 고변하였다. 이에 경종은 내병조에 정국(廷鞫)을 설치하고 목호룡에게 사건의 전모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목호룡은 흉적으로 정인중(鄭麟重), 김용택(金龍澤), 이기지(李器之), 이희지(李喜之), 심상길(沈尙吉), 홍의인(洪義人), 홍철인(洪哲人), 조흡(趙洽), 김민택(金民澤), 백망(白望), 김성행(金省行), 오서종(吳瑞鍾), 유경유(柳慶裕) 등을 지목하였다. 그러면서 이른바 삼급수를 고변하였다.

삼급수는 경종을 시해하기 위해 구상했다는 세 가지 방책이다. 우선 대급수(大急手)는 보검(寶劍, 칼)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김용택이 보검을 백망에게 주어 숙종의 국상 때 담장을 넘어서 궁궐로 들어가 경종을 시해한다는 것이다. 소급수(小急手)는 약을 써서 시해하는 방책이다. 이기지, 정인중, 이희지, 김용택, 이천기, 홍의인 등이 은(銀)을 지상궁(池尙宮)에게 주고, 그에게 약을 타게 하여 경종을 시해하는 것이다. 목호룡은 이 방법을 1720년(경종 즉위)에 실제로 반 년 동안 시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다음으로 평지수(平地手)는 폐출(廢黜)를 모의하는 방법이다. 숙종의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국상 때 나인 지열(池烈)과 환관 장세상(張世相)을 시켜 궁중에 유입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서의 내용에는 ‘세자 모(某)를 폐위시켜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조흡(趙洽)이 은(銀) 2천 냥을 백망과 김용택, 이천기에게 주어 나인 지열과 이영(二英)에게 나눠 주게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아울러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홍의인은 은 50냥, 심상길은 은 2백 냥, 이희지는 은 70냥을 냈다고 했다.

이와 같은 목호룡의 고변은 경종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국청에서는 이들을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을 시행하였다. 목호룡이 역모자로 지목한 사람 가운데에는 김창집의 손자이며 김제겸(金濟謙)의 아들인 김성행과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조카 이희지 등이 있었다. 목호룡은 “백망이라는 자가 ‘양(養)’자를 썼던 것은 이이명의 자(字)가 양숙(養叔)이었기 때문으로 그를 몰래 추대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론은 이이명이 30년 동안 역모 계획을 숨겼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찬탈하려고 했다면서 그를 참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창집은 정형(正刑)을, 이건명은 이이명과 이사명의 사촌 아우이면서 김창집의 혈당(血黨)이므로 조태채와 함께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목호룡은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삼급수의 방법을 통해 경종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한 결과 국청이 설치되어 8개월간 관련자들의 국문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을 비롯한 많은 수의 노론이 사사되는 화를 당하였다.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에게는 충(忠)이지만, 연잉군인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에게는 역(逆)에 해당되므로, 경종에 대한 당시 대신들의 충역 시비 문제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임사화의 평가는 영조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6. 이인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고 경종 보호를 구실로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은 문책을 받아 정권에서 배제됐다. 이에 소론 과격파는 경종 사인에 대한 의혹제기와 영조가 숙종의 적자가 아님을 명분삼아 모반을 정당화하고 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난은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성을 향해 북상하던 반군은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영·호남의 호응 세력도 지방군에게 소탕되면서 진압되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반란 준비가 진행되는 중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앙은 4월에 반란을 계획 중이었으나, 지방에서는 3월 초순부터 이인좌, 정세윤 등이 경기도 양성, 진위 등에서 군사를 모아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무신당은 중앙과 지방 간에 거사시기에 일정한 차이를 두고 반란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3월 초순에 안성, 평택, 양성, 괴산의 집결지에서 양반과 기병 50여 명을 포함한 약 300여 명의 군사가 모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모인 반군은 병기가 부족하여 전력이 보잘 것 없었다. 그러다가 소사평으로 이동하여 군기와 말을 보충하고 전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반군은 가천역에서 말을 탈취하기도 하였고, 각처의 부민(富民)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수물자와 군량 확보, 군사 모집을 위해 반군은 총융사 김중기(金重器), 전라병사 조경[후기](趙儆) 등이 반군에 동참한다는 정치선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선전이 큰 효과가 있어, 반군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확산되었고, 경기도 남부와 호서 일부지역에 행정과 치안이 마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사에 있던 반군이 청주(淸州)성을 점령하면서 반군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청주의 군관과 향임층이 반군에 가담하였고, 반군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반군의 세력은 황간, 회인, 목천, 진천 등지로 확대되었다. 반군은 이들 지역에 수령을 파견하였고, 환곡을 나누어 주고 군사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200~300명으로 시작한 청주성 점령은 각처, 각층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한편, 경기도와 호서의 반군이 청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영남과 호남세력이 동조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동조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3월 12일 안동에 도착한 이웅보(李熊輔) 등은 이인좌의 지시에 따라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지역민의 비협조로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자 이웅보는 안음, 거창으로 이동하여 병사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지역의 반군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전라도 역시 태인현감 박필현이 인근의 지역유지와 거병을 하기로 하였지만, 고부 토호 송하는 괘서 살포에는 동참하였지만 군사 동원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박필현이 관군을 동원하여 전주의 감영군과 합세하여 청주로 진격하는 계획 역시 사전에 탄로되었다. 또한 무장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은 30여 명의 군사로 전주에 입성하고자 하였으나, 태인에서의 군사 동원이 실패하자 해산하였다. 결국 거사 이전의 계획과 준비대로 호남에서의 군사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호남과 영남의 반군 동원이 수월치 않자, 평안병사 이사성도 사전의 약속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과 지방이 연계한다는 무신당의 반란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였고, 청주성의 반군은 도성으로 곧바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부는 반군이 양성, 소사 등지에서 집결하던 중에 최규서(崔奎瑞)가 보고를 올림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반군이 연결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먼저 성문의 방어를 강화시켰고,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를 여러 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반란 동조세력인 윤휴(尹鑴), 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중에서 한양 거주자와, 김일경과 목호룡 등의 가족을 체포하였다. 또한 반란으로 인한 쌀값 폭등과 이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한강 인근에 보관한 세곡을 성안으로 운반시켰다.

 

한양 도성의 안전을 확보한 이후, 정부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대장으로 하여 반군 진압을 시작하였다. 관군은 3월 24일 반군의 주력부대와 안성·죽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안성·죽산전투에서 관군은 반군을 제압하였고, 이인좌, 권서봉(權瑞鳳), 목함경(睦涵敬) 등 반군의 지도자를 생포하였다. 주력 부대가 관군에게 패배하고, 지도자까지 생포된 상황에서 반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게다가 반군을 소탕하는 민병대가 결성되어 반군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추풍령(秋風嶺)을 넘었을 때 이미 영남의 반군은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상황이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하여 4월 19일에 개선하였고, 영조는 숭례문에 나가 오명항을 친히 영접하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