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갑산을 가더라도 이 일은 내 뜻대로 할 것이다’
흔히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일을 밀어붙일 때 쓰는 관용구가 있다. 윗글처럼 ‘산수갑산’이 아니라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써야 한다. ‘삼수갑산(三水甲山)’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산골이라 이르던 삼수와 갑산. 조선 시대에 귀양지의 하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삼수(三水)’는 함경남도 삼수군에 있는 면의 이름으로서 삼수군의 군청 소재지다. 압록강의 지류에 면해 있다. ‘갑산(甲山)’은 함경남도 갑산군에 있는 면이며, 갑산군의 군청 소재지다. 개마고원의 중심부로, 교통이 불편하고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특유의 풍토병(風土病)이 있다.
풀이처럼 삼수와 갑산은 귀양살이에 어울리는 오지 중의 오지로서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등의 관용구 형태로 ‘자신에게 닥쳐올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라도 어떤 일을 단행할 때 하는 말’로 사용된다.
흔히 ‘산수갑산’이라 잘못 쓰는 것은 우리말 ‘산수(山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삼수갑산’이라 써야 옳다.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조국을 위해 앞장서 싸운 호국선열들과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드려야 하는 호국보훈의 달이 6월이다
‘삼수갑산’을 ‘강’이나 ‘산’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산수갑산’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삼수갑산을 간다’는 말은 ‘귀양을 가거나 매우 어렵고 곤란한 처지에 이르더라도’라는 의미다. 삼수와 갑산은 북한에 있는 지명으로 ‘삼수’는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겨울철 평균 온도가 섭씨 영하 16~18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곳이며 가장 오지(奧地)다. ‘갑산’은 함경남도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으로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특유의 풍토병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불편한 곳이다. ‘甲山(갑산)’이라고 쓰는 것을 보아도 큰 산이 겹겹이 쌓여 있는 오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삼수갑산은 매우 춥고,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큰 죄를 지은 사람을 귀양 보내는 적소(謫所, 귀양지)로 손꼽혔다. 대부분 이런 지역으로 귀양을 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려웠다.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라고 하면 최악의 상황을 강조하여 결연한 의지를 밝힐 때 쓰는 말로 ‘몹시 어려운 지경’이나 ‘최악의 상황’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띤다. 그런데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산수갑산(山水甲山)’으로 표현하면 ‘산수(山水)’가 산자수려(山紫水麗)의 줄임말로 산이 붉고, 물이 맑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뜻한다. 그래서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자신에게 닥쳐올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일을 단행할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그 일은 꼭 해내고 말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삼수갑산’을 ‘산수갑산’으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삼수갑산’에서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이런 오류가 나왔을 수도 있고, ‘삼수갑산’을 경치가 좋은 곳으로 잘못 알고 ‘산수갑산’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삼수’는 ‘석 삼(三)’자에 ‘물 수(水)’자로 이루어진 것이고, ‘삼수갑산(三水甲山)’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이라는 고장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이곳은 모두 함경남도에 있는 오지로, 아주 춥고 교통도 불편한 지역이었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중죄인들을 이곳으로 귀양 보냈기 때문에 이곳에 한번 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산수갑산'이라는 음식점 앞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배불리 먹고 나니 이제야 산수갑산이 제대로 눈에 보이네!"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먹고 보자'는 속담이 생각나."
위 대화에서 '산수갑산'은 '삼수갑산(三水甲山)'을 잘못 알고 쓴 말이에요. '산과 물'을 한자어로 표현한 '산수(山水)'가 익숙하다보니 '산수갑산'이라고 잘못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삼수갑산은 함경남도에 위치한 '삼수'와 '갑산'의 결합말입니다. '삼수(三水)'는 압록강, 삼수동수, 어면강 세 개의 큰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고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16~18도로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지요. '갑산(甲山)'은 개마고원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큰 산이 겹겹이 싸인 험한 곳이에요. 즉 삼수갑산이란 산세가 험한 데다 너무 추운 곳이라는 뜻으로 '몹시 어려운 지경'이나 '최악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써야 해요. 즉 '삼수갑산'을 '산수갑산'으로 혼동하면서 그 뜻조차 '경치가 좋은 곳'으로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절대 양보 못 해!"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평화를 위협하는 일은 허용해선 안 된다."
삼수갑산(三水甲山). 반드시 동사 '가다'와 함께 쓰여 '멀고 험한 곳으로 가다',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는 뜻이다.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너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 삼수갑산이 도대체 어디 길래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가. 일단 물이 있고 산이 있는 것을 보면 무척 험한 계곡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삼수는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갑산은 함남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마을이다. 삼수는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18℃ 안팎으로 국내에서 가장 춥다. 갑산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특유의 풍토병이 지독한 데다 평균 해발이 1300m여서 사람살기가 무척 불편하다. 더욱이 사람의 발길마저 닿기 힘든 오지다. 하늘을 나는 새조차 찾지 않는 산간벽지다. 조선시대 중죄인이 가는 대표적 유배지였다. 한 번 가면 죽어서 나올 정도다.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항일 유격활동 무대로 자주 이용됐다. 농민 출신 의병장 홍범도. 산수와 갑산을 중심으로 의병대를 조직했다. 항일유격대 토벌에 나선 일본군은 대부대를 이끌고 삼수 산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갑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 역시 홍범도의 의병대를 막지 못했다. 일본 토벌대는 많은 전리품을 남겨 놓은 채 갑산을 철수했다. 이 밖에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삼수와 갑산에서 혁혁한 항일전과를 올렸다.
삼수갑산(김소월 작)이란 시가 있다. "삼수갑산~ 오고가니 기험(崎險)타 아하~ 산 첩첩이라~ 멀더라~ 내가 오고 내 못가네~ 날 가두었네."
삼수갑산을 요즘 언론이 간다.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회구조망이 좀 슬고 있다.
재산이 풍비박산이 나면 이웃이나 친지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죄를 지어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될 때도 밤 보따리를 싸게 된다. 이때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하게 되는데 야반(夜半)은 한밤중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한밤중에 남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가는 것이다. 이를 잘못 사용하여 ‘야밤도주’라고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야밤’은 깊은 밤 또는 어두운 밤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야밤도주’를 어두운 밤에 도망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사자성어가 아니라 우리말과 한자어를 섞어 만든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한자 숙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는 한자의 음을 잘못 읽거나 처음부터 잘못알고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병상린’이라는 표현도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같은 병을 가진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에서 출발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동정하고 서로 돕는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한자 숙어는 ‘동병산린’이 아니라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맞다.
이 같이 ‘동병상린’이라고 잘못 읽는 이유는 한자의 ‘불쌍히 여길 련(憐)’자를 이와 비슷하게 생긴 한자의 린 자로 잘못 읽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 것을 ‘동병상린’ 이라고 잘못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밤중에 도망간다는 뜻으로 ‘야밤도주’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는데 이것의 올바른 한자 숙어는 ‘야반도주(夜半逃走)’이다.
여기에서 ‘야반’이라는 말은 ‘밤중’이라는 뜻으로 ‘야반도주’의 ‘야’자가 ‘밤’을 뜻한다는 것에서 유추해 ‘야반도주’를 ‘야밤도주’로 잘못 알고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려운 사람끼리 동정하고 돕는 것은 ‘동병상린’이 아니라 ‘동병상련’이고, 한밤중에 도망하는 것은 ‘야밤도주’가 아니라 ‘야반도주’가 정확한 한자 숙어 표현이다.
‘집을 처분하려다가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해 봐주었더니 어느새 집을 팔고, 가족 모두가 야밤도주했다.’
빚을 지거나 잘못을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도망가는 것을 흔히 ‘야밤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하는 바른말은 ‘야반도주(夜半逃走)’이다.
‘야반도주’는 ‘남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도망하다.’의 뜻이다. ‘야반(夜半)’은 말 그대로 밤의 반, 즉 밤의 가운데쯤이니 한밤중을 의미한다. 여기에다 ‘도망’을 뜻하는 ‘도주(逃走)’가 붙어 ‘야반도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밤중에 도망을 갔다는 사실에 집착하면서 ‘야밤도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야밤(夜밤)’은 ‘깊은 밤’을 뜻하는 말이니 야밤에 도망을 간 것은 ‘야밤도주’가 맞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밤’은 ‘야(夜)’에다가 순우리말 ‘밤’이 붙은 말이어서 한자어로 된 사자성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야밤’을 굳이 사용하고 싶어 무엇인가 아쉽다면 ‘야밤에 술 먹고 돌아다니지 마라.’처럼 ‘야밤’을 사용하면 된다.
요즘 연이은 성범죄 발생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몹쓸 짓을 하고 야반도주하는 성폭행범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하며, 관계 당국도 성폭행 범죄의 예방과 범인 검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성대묘사는 '성대모사’, 양수겹장은 '양수겸장’, 홀홀단신은 '혈혈단신', 절대절명은 '절체절명’으로 표현해야 맞다. 절명(絶命)은 “목숨이 끊어짐. 죽음”의 뜻으로 한자를 쓰는 여러 나라에서 두루 쓰지만, 절체절명(絶體絶命)은 오직 일본인들만이 쓰는 말이다. 일본의 삼성당판 <대사전>을 뒤져보면 “ぜつたいぜつめい”(제쓰다이제쓰메이·絶體絶命)를 올림말로 싣고, “위험하거나 곤란한 일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 막다른 경지에 몰려서 오도가도 못함”이라고 풀고 “~의 궁지(窮地)”를 보기로 싣고 나서, ‘절체’와 ‘절명’은 구성점(九星占)에서 말하는 흉한 별(흉성)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와 언론인들이 그 말 본래의 뜻과 달리 제멋대로 쓰는 모양은 우습기 그지없어서 서울시의 꼴불견 영어 “하이 서울!”을 떠올린다. 다음 글들에서 따옴표 부분은 화살표대로 고쳐 써야 한다.
*국민회의 ○○○총재와 자민련의 ×××총재는 4·11 총선 이후 여권의 과반수 의석 확보 기도 등 공세적 국정 운영에 공동 대처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필요에 따라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다.(ㅈ일보) →긴박한/ 절실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진정한 잠재력을 재확인해 볼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다.(ㅈ일보) →절호의/ 다시 없을.
*우리 전통에 아들이 태어나면 그놈 몫으로 선산에 소나무를 심고, 딸이 태어나면, 밭두덩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 집안의 ‘절체절명의 소원을’ 위탁한 나무다.(ㅈ일보) →간절한 소원을/ 비원을.
*병들고 고단한 몸이 한가닥 소망조차 끊어져 이제는 ‘절체절명으로’ 머리를 돌에다 부딪쳐 죽어도 시원치 않고, 누구를 깨물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표준국어대사전) →어쩔 수 없어. ※‘절체절명’을 우리말처럼 올림말로 싣고 이런 예문을 보였다.
“작가는 당시 유방암 수술이라는 ‘절대절명’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절망을 안고 있었다."
"토끼도 ‘절대절명’의 위급 상황이 되면 캭캭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낸다."
"지금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체제 유지라는 ‘절대절명’의 과제가 그들의 눈앞에 놓여 있다.”
4건의 예문에서 ‘절대절명’은 틀린 말이다. 표준어는 ‘절체절명’이다. ‘절대절명’은 한자 사자성어인 ‘절체절명’을 잘못 적은 것이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은 ‘몸도 목숨도 다 되었다는 뜻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즉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나 궁지’를 일컬을 때 ‘절체절명’이라 표현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쓰인다. 이 같은 의미를 표현할 때 ‘절대절명’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절명’은 ‘절체절명’의 비표준어이다. ‘체’를 ‘대’로 발음하는 것은 일본 한자 읽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왜말 부스러기는 말끔히 추방해야 할 찌꺼기이다.
신문기사 오용사례 몇 개를 든다. “7회 말 무사 3루의 위기에서 4, 5, 6번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팀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냈다./하지만 ‘절대절명’의 순간처럼 보이는 사진들이지만 실제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을 올린 네티즌들이 극적인 재미를 위해 컴퓨터로 합성해 현실감 있는 사진을 만들었다.”(→절체절명) 이젠 ‘절대절명’이란 낱말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리자.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절명(絶命)은 “목숨이 끊어짐. 죽음”의 뜻으로 한자를 쓰는 여러 나라에서 두루 쓰지만, 절체절명(絶體絶命)은 오직 일본인들만이 쓰는 말이다. 일본의 삼성당판 <대사전>을 뒤져보면 “ぜつたいぜつめい”(제쓰다이제쓰메이·絶體絶命)를 올림말로 싣고, “위험하거나 곤란한 일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 막다른 경지에 몰려서 오도가도 못함”이라고 풀고 “~의 궁지(窮地)”를 보기로 싣고 나서, ‘절체’와 ‘절명’은 구성점(九星占)에서 말하는 흉한 별(흉성)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와 언론인들이 그 말 본래의 뜻과 달리 제멋대로 쓰는 모양은 우습기 그지없어서 서울시의 꼴불견 영어 “하이 서울!”을 떠올린다. 다음 글들에서 따옴표 부분은 화살표대로 고쳐 써야 한다.
*국민회의 ○○○총재와 자민련의 ×××총재는 4·11 총선 이후 여권의 과반수 의석 확보 기도 등 공세적 국정 운영에 공동 대처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필요에 따라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다.(ㅈ일보) →긴박한/ 절실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진정한 잠재력을 재확인해 볼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다.(ㅈ일보) →절호의/ 다시 없을.
*우리 전통에 아들이 태어나면 그놈 몫으로 선산에 소나무를 심고, 딸이 태어나면, 밭두덩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 집안의 ‘절체절명의 소원을’ 위탁한 나무다.(ㅈ일보) →간절한 소원을/ 비원을.
*병들고 고단한 몸이 한가닥 소망조차 끊어져 이제는 ‘절체절명으로’ 머리를 돌에다 부딪쳐 죽어도 시원치 않고, 누구를 깨물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표준국어대사전) →어쩔 수 없어. ※‘절체절명’을 우리말처럼 올림말로 싣고 이런 예문을 보였다.
"형이 도박에 손을 대서 가정이 풍지박살이 났다?"
"사업의 실패로 회사가 풍지박산이 났다?"
무엇인가 사방으로 날아 흩어짐을 의미하는 말은 풍비박산입니다. 줄여서 풍산이라고도 하는데, 아직도 많은 분들이 풍지박산 또는 풍지박살이라는 틀린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풍(바람 風)
비(날 飛)
박(우박 雹)
산(흩을 散)
: 바람이 날고 우박이 흩어진다.
바람이 날고 우박이 흩어지는 것처럼 어떤 일이나 계획이 원만하게 되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듯 파탄이 났을 때 쓸 수 있는 말은 풍지박산이 아니라 풍비박산이다. 어려운 일에 처해 가정이나 단체 등이 해체돼 버리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일에 처하게 되면 그 모양새를 두고 우리는 ‘풍지박산이 났다.’ 또는 ‘풍지박살이 났다.’ ‘풍비박살이 났다.’ 등으로 사용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해야 할 바른말은 ‘풍비박산이 났다.’이다.
´풍비박산´인가 ´풍지박산´인가?
난리가 나거나 큰 재난이 닥치면 단란했던 가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애써 마련했던 가구나 물건들 역시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부서지거나 깨지거나 여기저기 딩굴거나 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됩니다.
´풍비박산´이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날아 흐터지고, 우박처럼 깨어져 조각조각 부서지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도 제대로 있지 못하고, 모든 게 사방으로 날아 확 흩어지는 게 바로 풍비박산입니다.
그런데 이 ´풍비박산´을 흔히 ´풍지박산´이라고 합니다만, 그런 말은 있지도 않거니와 풍비박산의 뜻을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풍지´를 문풍지로 본다면, 문풍지가 조각조각 찢어져 흩어진다는 뜻이 될 것이고, ´풍지´를 바람 부는 땅으로 본다면 바람부는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난다고 견강부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난리나 큰 재난 등으로 해서 일가친척이 뿔뿔이 헤어지고, 가재도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깨어지고 없어지는 모양이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풍비박산´이라 말해야 올바른 것입니다.
* 대화(부부간) *
(남) :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정부군의 공격으로 풍비박산, 북부산악 지대에서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다는구려.˝
(여) : ˝이라크내 쿠르드족의 참상은 이미 국제 문제화하고 있고, 유엔 안보리에서 범세계적 원조를 촉구하는 결의안도 채택했다던데요.˝
(남) : ˝전쟁의 참상이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소. 6?25때 풍비박산 살 길을 찾아 헤매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는구려.˝
(여) : ˝풍찬노숙에 삼순구식하면서, 풍전등화 같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고초란 말로 다할 수 없었지요.˝
* 여러분 잠깐만! *
방금 대화 가운데 나온 ´풍찬노숙, 삼순구식, 풍전등화´등은 어떤 뜻의 말일까요? 풍찬노숙(風餐露宿축)이란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잠을 잔다는 말이고, 은 한달에 아홉번 식사를 한다는 말이니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란 바람 앞의 등불이란 말로서 몹시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거나 存亡의 위기에 처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모두 어려운 고초와 위기를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은 바람이 흩어지고 우박이 사방으로 날리듯 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가리킨다. 이 사자성어는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 말을 ‘풍지박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아마도 이것은 바람과 우박이 지면 위로 떨어지는 현상과 얼른 연상이 되고, 또한 ‘풍비’라는 어색한 발음보다 ‘풍지’가 발음에 편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지박살 ‘風地雹散’(풍지박산)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風地雹散’(풍지박산)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눈 씻고 찾으려 해도 그런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전에 그런 엉터리 말이 나올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한 술 더 떠 ‘풍비박산’을 ‘풍지박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을 억지로 사자성어로 써본다면 ‘風地博殺’쯤으로 조립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괴상한 단어가 사전에 나올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박산’(雹散)은 어떤 물건이나 형태가 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풍비박산’(風飛雹散)이란 바람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우박이 어지럽게 날리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곧 아찔하게 앞이 안 보이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상황이 꼬이고 어지럽게 되어 흩어져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령 어떤 가장이 사업주로 있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났을 때 “회사가 부도를 내자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들은 흩어져 서로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 말을 쓰면 무리가 없다.
2017년 대한민국은 최순실 국정농단(國政壟斷) 사건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박근혜 정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황을 ‘풍비박산’을 수식어로 묘사하려 한다면, “최순실 사건으로 풍비박산 난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부터 그 거취가 불투명해짐으로써 이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표현하면 된다.
그런데 풍비박산이란 사자성어를 “중고차 가격이 풍비박산 나서 이 기회에 중고차를 한번 사봄직도 하다”라고 한다거나, “그는 인생이 풍비박산 나서 모든 희망들을 접고 방에 처박혀 생활한 지 벌써 3 년이 되었다”에서처럼 쓴다면 표현이 어째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차 가격과 인생을 풍비박산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당초부터 무리이기 때문이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을 ‘風地博殺’(풍지박살)로 잘못 말하는 경우는 병영생활을 하였거나 아니면 태권도 등 무도장(武道場)을 다녔거나, 한 때 용감무쌍(勇敢無雙)한 경험을 했던 사람일수록 심하다. ‘풍지박살’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그럴듯한 단어조립이다. 이 말은 얼른 느끼기에 풍비박산보다 의미가 훨씬 강하다. 왜냐 하면 이 말은 큰 지진이 나서 땅들이 갈라지고 건물들이 죄다 파괴된 것 마냥 땅이 형체가 없어지고 그 위에 있는 모든 물체들이 모조리 부서지는 처참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군대를 갔다 온 50대 이상 남자라면 성경에서 10계명을 흉내 낸 것 같은 ‘사병 10가지 수칙’을 달달 외워야 세 끼 ‘짭밥’도 먹고 저녁에 잠도 잘 수 있었다. 필자의 기억으론 제1수칙이 “나는 초전에 적을 박살내겠다”였다. 1970-80년대 병영의 정문 간판이나 건물 벽에는 대개는 ‘초전박살’(初戰博殺)이란 큰 글씨의 구호가 붙어있기 마련이었다. ‘초전박살’ 밑에 혹은 따로 비장의 반공구호가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때려잡자 김일성, 박살내자 괴뢰군”이라는 듣기만 해도 살벌한 캐치프레이즈였다. 대한민국의 사병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며 전의를 불살랐지만 박살나도 시원찮을 김일성이 여든세 살이나 장수하고 자연사(1994 년)했으니 유신체제하(維新體制下)의 그 구호가 무색하게 되었다.
아무튼 여기에서 말하는 ‘박살’(博殺)은 깨어지고 부서지다는 뜻이다. 한자가 아닌 순수한 우리말에도 ‘박살내다’라는 말이 있어 ‘박살’이란 단어는 특이하다. ‘박살내다’라는 말은 서로 치고 받는 정치권에서 흔히 쓰이고 있을 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서로 멱살을 쥐고 씩씩거리며 싸움하는 사람이 눈을 부라리면서 “박살 나봐야 알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빈번히 쓰인다. 2017년 7월 정계를 발각 뒤집어놓은 문재인 대통령 아들에 대한 취업특혜 의혹 제보조작 사건을 놓고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가 ‘미필적고의’ 운운하자, 이에 발끈한 박주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 TV 인터뷰에서 ‘추미애 대표가 국민의당을 박살내려 하고 있다”고 성토해 그 무렵 세간에 ‘박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나 문학 작품에 자주 사용되는 사자성어를 우리말 성경은 가급적 사용을 회피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아마도 이것은 번역가들이 쉬운 문자로 한글을 널리 보급하려는 데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고, 또한 사자성어가 과장된 어감이 있기에 가능한 한 간결하고 짧은 어휘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런 경향은 한글이 보편화되는 추세인 요즘에 갈수록 심화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개역개정 성경이 나오기 전 개역한글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전능을 찬양하면서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편 139:14)고 번역했다. 그런데 1998년 나온 개역개정 성경은 이를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고 약간 쉽게 번역했다.
성경이 사자성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필자가 보기에도 잘한 일이다. 가령 백세의 아브라함과 구십 세의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출산하리요”(창세기 17:17)라고 성경은 번역해놓고 있다.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를 사자성어로 표현하여 “아브라함이 포복절도(抱腹絶倒)하며”한다든가, “아브라함이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한다든가, 혹은 “아브라함이 파안대소(破題大笑)하며”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재미는 있는지 몰라도 거룩한 성경의 진지함이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성경 번역에서 사자성어를 사용하길 꺼려하는 이유다.
성경이 구태여 ‘풍비박산’이란 사자성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곳은 부지기수로 많다. 이를테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르비딤 전투에서 아멜렉 사람들과 겨루어 대승을 거두었을 때, 아모리 다섯 족속들을 질풍노도(疾風怒濤)처럼 몰아붙여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삼손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려 3천 명이나 되는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을 때, 히스기야가 통치하는 시기에 유다 왕국을 공격하던 산헤립 군대가 그들의 진영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되어 좌충우돌(左衝右突)하다 전원이 죽어나빠졌을 때 등의 상황은 적들이 깨지고 흩어지며 죽게 되는 형국이므로 그러한 묘사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잘 어울린다.
대중 앞에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풍비박산’을 적절한 부분에서 능란하게 사용하면 설교를 한층 박진감 있게 해주면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죄가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주지 않아야 한다(로마서 6:12-13).
그래서 첫 전투가 중요하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첫 전투에서 마귀 사탄에게 밀리면 그는 여지없이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사탄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초전박살’(初戰博殺)의 영적 기상으로 적들을 무찔러야 한다. 그럴 경우 저들은 한 길로 왔다가 ‘풍비박산’ 일곱 길로 달아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를 흉내 내 귀신을 쫓아보겠다고 나선 에베소의 유대인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처럼 어설픈 영적 상태로는 귀신을 쫓기는커녕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성령의 전신갑주(全身甲冑)이다. 믿는 자는 악한 마귀들을 첫 전투에서부터 무찌르려면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를 손에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들어야 한다(에베소서 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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