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
[속] 손님 대접하기가 어려운 터에 손님이 속을 알아주어 빨리 돌아가니 고맙게 여긴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살림이 곤궁한 사람의 집에 손님이 찾이오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무엇이든 대접을 해야 하는데 마땅히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주인을 보고 눈치 빠른 손님은 얼른 볼일만 보고 바로 일어선다. 주인은 그러한 손님이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뒤돌이서 가는 손님의 뒤꼭지(뒤통수)까지 예쁘게 보인다. 손님 대접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손님이 주인의 딱한 속사정을 알고 빨리 돌아가 주어서 고맙게 여기는 것을 비유하여 “가는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라고 한다. 너나없이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 만들어진 가슴 아픈 속담이다.
사람의 어원
먼저, 사람이 무엇인지 우리 말에게 물어봅니다. ‘사람’은 ‘살+암’의 짜임입니다. ‘암’은 명사화 접미사이니, 고민할 게 없습니다. 문제는 ‘살’이죠.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살’에 접미사 ‘다’가 붙으면 ‘살다’가 됩니다. ‘신’에 ‘다’가 붙어 ‘신다’가 되고, ‘발’에 ‘다’가 붙어 ‘밟다’가 되는 것과 같은 짜임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죽지 않은 존재라는 뜻이죠. 죽지 않은 존재는 움직입니다. ‘죽음’의 짝말인 ‘삶’은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살’은 털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털 없는 원숭이’죠. 다른 모든 짐승은 털이 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털이 없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때 가장 먼저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에서 이름이 붙은 것은 아주 쉬운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인 5행론에서도 털이 없는 존재를 ‘나충(裸蟲)’으로 분류하여 나머지 동물과 특성을 비교하여 이해합니다.
셋째. ‘살’은 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사뢰다’의 짜임은 ‘ᄉᆞᆲ+다’인데, 받침인 비읍이 순경음화를 거쳐 ‘외’로 변한 것이 ‘사뢰다’입니다. 특히 어른에게 말할 때 쓰는 말이죠. 따라서 이에 따르면 사람은 ‘말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다른 짐승과 견줄 때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현상이고 특징이죠.
‘사뢰다’의 ‘삷’은 ‘말씀’에 자취가 남았습니다. ‘말씀’의 옛 기록은 ‘말ᄉᆞᆷ’인데, 이 ‘삼’이 바로 ‘삷’의 이름씨 꼴입니다. 몽골어로 무당은 ‘shaman’이고, 만주어로는 ‘saman’인데, ‘sam’이 바로 ‘삼’의 자취입니다. 샤먼은 신의 뜻을 사람에게 말로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뜻이죠. 무당을 우리말 사투리로 ‘심방’이라고 하는데, 이 ‘심’이 바로 ‘sam’입니다. ‘방’은 ‘서방, 앉은뱅이’에서 보듯이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넷째. ‘살’에는 높다는 뜻이 있습니다. ‘독수리, 솔개, 수라상’에서 보듯이 ‘솔, 살, 술’은 몽골 만주를 비롯한 북방어로 ‘높다, 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높고 큰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른 짐승과 구별할 때 그렇다는 말이죠. 동양에서는 이런 생각을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 ‘사람’의 뜻일까요? 하나로 콕 찍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뜻이 다 들어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앞의 세 가지 뜻을 합치면 넷째의 뜻이 됩니다. 다른 짐승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죠.
사람은 얼마나 큰 존재일까요? 아마도 사람을 가장 큰 존재로 묘사한 글은 「천부경(天符經)」일 겁니다. 그 안에 ‘人中天地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인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 안에 하늘 땅이 다 있다니요? 사람은 천지 속에 있는 존재인데, 천지가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주보다 더 큰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이고, 동학의 이념인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말을 더 크게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발상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이전으로 더 거슬러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천부경」이 해월 최시형 이후에 나온 글이라고 봅니다.(『한국의 활쏘기』) 계연수가 1917년에 묘향산 바위에 새겨진 것을 탁본해서 대종교에 갖다주었다는데, 거짓이거나 스스로 새긴 것을 탁본한 것일 겁니다. 당시 막 태어난 단군교와 대종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이 많이 쏟아져나왔습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일입니다. 더구나 역사를 논하는 자리라면 더 그렇습니다. 종교가 역사를 대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시형 교주가 행한 의례 중에 가장 놀랄 만한 것이 향아설위(向我設位)입니다. 종전에는 유교 예법에 따라 벽 쪽으로 제사상을 차렸는데, 최시형은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따라 하늘이 있는 곳을 향해 제상을 진설해야 한다며 사람(자손)을 향해 제사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라거나 사람 안에 하늘(천지)가 있다는 발상은, 그 이전에는 없던 것입니다.
나중에 더 살펴보겠지만, ‘사람’이라는 말에는 하늘에게 말로 묻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과 곧장 소통할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말의 뿌리에 벌써 동학에서 강조하는 사상의 싹이 들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몸’을 보겠습니다. 드라비다어로는 ‘mēnu’이고, 몽골어로는 ‘beyen’, 만주어로는 ‘beye’, 터키어로는 ‘beden’입니다. 드라비다어를 닮았는데, 뜻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몸을 가리키는 다른 말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은 18세기 들어서 ‘낯’을 뜻하는 말로 쓰였지, 그 전까지는 몸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얽+울’의 짜임으로 ‘울’은 ‘방울’에서 보이는 접미사입니다. 그러니 ‘얽’이 뜻이겠죠. 이것은 ‘얼개’의 ‘얽’입니다. 얽어놓은 겉모양을 말하는 것이죠. 몸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부분을 얼기설기 얽어놓은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는 ‘허우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허울+대’의 짜임인데, ‘허울’은 겉모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동작을 가리키는 말 중에 ‘허우적거리다, 허우대다’가 있는데, 같은 뿌리를 지닌 말들입니다. ‘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키다리, 꺽다리’의 ‘다리’가 줄어든 말입니다. 따라서 허우대는 사람의 겉모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상, ‘몸’의 뿌리를 찾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면 단순 무식하게라도 판단해야죠. ‘몸’은 ‘모+ㅁ’의 짜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ㅁ’은 명사화 접미사죠. 그렇다면 ‘모’는 그림씨나 움직씨로 봐야 하는데, 뭘까요? ‘얼굴’에서 여러 가지 부분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암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몸은 얼개와 같습니다. 머리 몸통 팔다리 같은 여럿이 모여서 몸을 이룹니다. 게다가 불교 철학에서도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죠. 그럴듯합니다. 몸은 뭔가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몸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인 얼굴과 허우대가 모두 겉모양을 나타내는 말인 것으로 보아, 사람의 실속은 ‘몸’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실속은, 남은 하나 ‘마음’일 것입니다. ‘마음’의 옛 표기는 ‘마ᄉᆞᆷ’입니다. ‘맛+ᄋᆞᆷ’의 짜임인데, 뜻이 선뜻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겨레의 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만주어로 마음은 ‘maji-len’이고, 의지는 ‘mujin’입니다. 골디어로 심장은 ‘mewa’이고, 드라비다어로 가슴은 ‘māvam’입니다. 이래 놓고 보니 ‘māvam’은 ‘마음’도 닮고, ‘몸’도 닮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는 같은 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māvam’과 ‘가슴’이 서로 충돌하면서 ‘마음’은 가슴의 속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뜻은 또렷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좀 더 과감하게 원형을 찾아보겠습니다. 지금의 글자 모습을 토대로 그 전에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추리해보는 것이 ‘조어(조상언어)’입니다. ‘마ᄉᆞᆷ’에서 ‘ᄋᆞᆷ’을 명사화접미사로 본다면, 뜻은 ‘맛’에 있는 셈입니다. ‘맛’의 조어는 ‘맏’으로 재구할 수 있고, 이것을 앞서 살펴본 사람의 네 가지 뜻과 각기 견주어 보면 세 번째 특징인 말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맏’은 ‘묻다, 말하다’의 어근 ‘묻,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말하고 묻습니다. 묻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무당’입니다. 이것을 무당(巫堂)이라고 적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의 짓입니다. ‘무당’은 ‘묻+앙’의 짜임입니다.(『어원으로 본 한국 고대사』) ‘앙’은 ‘마당’에서 보듯이 접미사입니다. ‘묻’은 ‘묻다’의 어근과 똑같죠. 하늘의 뜻을 묻고, 그것을 말(공수)로 전해주는 사람이 무당입니다. 앞서 말씀(말ᄉᆞᆷ)의 ‘ᄉᆞᆷ’이 무당을 뜻하는 만주어 ‘saman’의 ‘sam’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무당의 사투리 ‘심방’의 ‘심’도 그것을 뜻한다고 했죠. 어찌 보면 ‘가슴’의 ‘슴’도 그것일 수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듭니다.
'우리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_우리말 표현 (0) | 2024.10.27 |
---|---|
결이 바르다_관용 표현 (1) | 2024.10.26 |
가는 날이 장날 vs 오비이락_말-글 자료 (7) | 2024.10.03 |
가게 vs 상점_어원 자료 (0) | 2024.10.01 |
윤동주 유고 시집_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5부 (1) | 2024.09.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