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엣가시 첩 시앗_남편의 첩을 이르는 말들
자칫 부주의하면 눈에 크고 작은 이물(異物)이 들어갈 수 있다. 때로는 가시가 눈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눈엣가시'다. 다른 이물질도 아니고 뾰족한 가시가 들어갔으니 눈이 얼마나 아프고 또 성가시겠는가.눈에 들어간 가시처럼 성가시고 거슬리는 사람을 비유하여 ‘눈엣가시'라고 한다.
‘눈엣가시'에는 ‘남편의 첩'이라는 의미도 있다. 본처에게 남편의 첩은 가시처럼 성가시고 거슬리는 존재이기에 ‘눈엣가시'로 비유한 것이다.
‘첩(妾)'을 뜻하는 고유어에 ‘시앗'이 있다. 이는 ‘쇠갓'에서 변한 어형인데, ‘쇠'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이라는 의미이며, ‘갓'은 ‘아내'를 뜻한다. 그러므로 ‘시앗'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처'다. 남편에게 첩은 아무래도 본처에 비해 심리적인 거리가 있는 여자이니, 이러한 사실이 단어 만들기에 반영된 것이다. 현대는 공식적으로 첩을 둘 수 있는 시대가 아니므로 ‘시앗'이니 ‘첩'이니 하는 말은 생경하게 들린다. ‘시앗'은
“시앗 싸움에 요강장수”
“시앗이 시앗꼴을 못 본다.”
등과 같은 속담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
첩
첩은 신분이나 중혼 등 혼인 성립 요건에 하자가 있거나 혹은 정식의 혼인 의례를 갖추지 않고 맞아들인 규방의 반려를 말한다. 이칭으로 첩실, 소실, 부실, 별실 등이 있다. 이외에도 신분에 따라 양첩, 천첩, 비첩, 기첩 등으로도 불렸다. 1413년(태종 13)에 처가 있는데 또 처를 얻는 중혼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한 사람의 처 외에는 모두 첩이 되었다. 모계 성분을 중요하게 여긴 조선 시대에 첩자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였다. 그런 점에서 후사를 얻기 위해 첩을 들인다는 명분보다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이 존재하기도 했다.
신분이나 중혼 등 혼인 성립 요건에 하자가 있거나 혹은 정식의 혼인의례를 갖추지 않고 맞아들인 규방의 반려. 첩실 · 소실 · 부실 · 별실 · 별가 · 별방 · 별관 · 측실 · 추실 · 가직 · 여부인 · 작은집 · 작은 마누라 · 작은 계집.
첩의 이칭으로는 첩실(妾室), 소실(小室), 부실(副室), 별실(別室), 별가(別家), 별방(別房), 별관(別館), 측실(側室), 추실(簉室), 가직(家直), 여부인(如夫人), 작은집, 작은 마누라, 작은 계집 등 다양한 용어가 있다. 또 첩은 신분이 양인인지 천인인지에 따라 양첩(良妾), 천첩(賤妾)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종으로 첩이 되었으면 비첩(婢妾), 기생으로 첩이 되었으면 기첩(妓妾)이라고 했다. 적자(嫡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첩은 서모(庶母), 조부의 첩은 서조모(庶祖母)라고 지칭되었다.
첩은 전근대시대에 남성이 여러 여성을 거느릴 수 있다는 인식하에서 배태되었다.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삼되, 이들에게 병렬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다처제(多妻制)이고, 오직 1명의 여성에게만 우월한 정처(正妻)로서의 지위를 주고, 나머지 여성을 첩이라 하는 것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에 해당한다. 첩은 일부일처제하의 처는 물론 다처제하의 처에 비해서도 차별받는 존재였다.
고대와 고려시대의 지배층들은 2처 이상을 처로 맞이하기도 했지만 신분이 낮은 여성을 데리고 사는 경우 처로 인정하지 않고 ‘첩’이라고 했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에 처가 있는데 또 처를 얻는 중혼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된 후에는 한 사람의 처 외에는 모두 첩이 됨으로써 처와 첩의 명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에서는 적처(嫡妻)와 첩 사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첩으로 인해 처의 지위가 침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낮은 신분으로 인해 천시 받던 첩은 조선 건국 이후의 이와 같은 법 제정과 유교 이념의 영향으로 또 다른 부정적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규정했던 조선시대에는 관료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처를 버리면 처벌했지만 첩을 버리는 행위는 규제하지 않았다. 따라서 첩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는 오롯이 남편의 사랑과 신뢰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만 첩이 자녀를 낳은 경우에는 처지가 조금 나았다. 남편과의 관계가 좀더 안정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법적으로도 권리를 일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가족 내에서 첩의 지위가 안정적이지 못한데 비해 가족에 대한 의무는 법으로 규정되었다. 가족내에서 첩의 의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제도가 복상(服喪) 제도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복상 규정에는 첩이 남편을 위해 참최(斬衰)주1 3년, 남편의 부모 · 적처 · 자녀를 위해 각각 기년(期年)주2의 상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다.
반대로 남편, 시부모, 적처, 남편의 자녀는 그를 위해 복상할 필요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자녀가 있는 서모(庶母)를 위해서는 자최(齊衰)주3 기년복을 입도록 했다. 이러한 복상 제도를 통해 첩은 남편과 적처, 남편의 직계 존속과 비속에게 일방적으로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자식이 있는 첩에 대해서만 남편의 자녀들이 서모로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첩이 어머니를 잃은 다른 첩의 자녀를 기른 경우에는 길러준 첩을 위해 친어머니와 같은 자최 3년복을 입도록 하는 규정도 있었다. 복상의 의무뿐 아니라 첩은 남편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처와 마찬가지로 연좌되었다. 또 남편, 적처, 시부모 등 남편의 가족이나 친족을 욕하거나 폭행하는 행위, 남편을 고소하는 행위,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도 처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심지어는 남편이 첩에 빠져서 처를 버리거나 학대한 경우에도 남편과 함께 처벌받았다.
첩에게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는 남편의 재산을 일부 상속받을 수 있었으며, 남편에게 적자녀가 없으면 그 자녀가 남편의 적처 재산의 일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유교적 제사형태가 정착되었던 조선시대에 처는 남편과 함께 가묘에 모셔져 봉사를 받았지만 첩은 가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소생자녀가 있으면 따로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첩을 두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의를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부부의 의를 강조하며 일부일처제를 표방하면서도 첩을 두는 것을 규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 내에서 첩의 일방적 의무를 강조하고 첩이 남편과 남편의 적처에게 순종하도록 했으며, 첩에 대한 처의 투기를 죄악시하여 가족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렇게 지배층 남성들은 법과 윤리를 내세워 처와 첩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미덕이라고 하며 가족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첩을 두는 것 자체가 가족 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시앗 죽은 눈물이 눈가에 젖으리’
‘시앗싸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와 같은 속담은 처첩간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해서 당시 지배층들은 후사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여색을 탐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존재하기도 했다. 전근대시대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자녀의 사회적 지위에 모계 신분이 중요했다. 천한 신분인 첩과 첩자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이 존재하여 첩자녀가 적자녀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후사를 얻기 위해 첩을 들인다는 명분은 수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시앗
요즘은 잘 쓰이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속담이 있다.
(1) 시앗 싸움에 요강 장수: 두 사람의 싸움에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는 말.
(2)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 어진 부인도 시앗을 보면 시기하고 증오한다는 말.
(3) 시앗이 시앗 꼴을 못 본다. : 시앗이 제 시앗을 더 못 본다는 말.
(4) 시앗 죽은 눈물만큼: 몹시 적다는 말.
이들 속담 속의 핵심 단어는 ‘시앗’이다. '시앗'은 '첩(妾)'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어서, 앞의 속담 속의 ‘시앗’을 ‘첩’이라는 한자어로 대체해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시앗’이라는 고유어는 한자어 ‘첩’에 밀려서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 ‘시앗’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말 친족 어휘에 빈번히 결합되어 나타나는 ‘시’의 어원을 풀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시앗'은 16세기의 "순천김씨묘출토간찰"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는 ‘시앗’이 아니라 ‘싀앗’으로 나온다. '싀앗'의 '싀'는 '싀집>시집', '싀아비>시아비’, '싀어미>시어미’ 등에 보이는 선행 요소 ‘싀’와 성격이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반면, '앗'의 경우는 별 어려움 없이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다. '처(妻)'을 뜻하는 '갓'이라는 단어가 '싀'의 'ㅣ'에 영향을 받아 변형된 어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시앗'은 16세기의 '싀앗'으로, 16세기의 '싀앗'은 그 이전의 '*싀갓'으로 소급한다고 볼 수 있다. '*싀갓'에서 '싀앗'으로, 또 '싀앗'에서 '시앗'으로 변하는 과정은 음운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배고개'가 '배오개'가 되듯이 선행하는 'ㅣ' 모음 뒤에서 'ㄱ'이 'ㅇ'으로 교체되거나, '믭다'가 '밉다'로 변하듯이 'ㅢ'가 'ㅣ'로 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음운 현상이었다. '시앗'이 '*싀갓'으로 소급되고 '갓'이 '처'를 뜻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싀'의 정체만 밝혀지면 '시앗'의 어원은 쉽게 드러난다.
'싀갓'이 '본처(本妻)'와 대립되고 '갓'이 '처와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싀'는 '본(本)'과 대립함을 알 수 있다. '본'과 대립하는 의미는 '부차적, 간접적, 소원한' 등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싀'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관계가 소원한' 정도로 해석된다. 이에 따르면 '*싀갓'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처'가 된다. '본처'와 비교해 보았을 때 '첩'은 '본처'보다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또 부차적인 처이기에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싀'를 '새(아래아)'의 변화형으로 보고 '신(新)'으로 해석한 다음 '*싀갓'을 '새로운 처'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싀'가 '새(아래아)'로 소급한다는 근거도 없고 또 아주 이른 시기에는 '새(아래아)'가 '싀'로 변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에는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또 '싀'에서 변한 '시'에 '바깥[外]'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시'를 한자 '시(媤)'로 보기도 하나 이 또한 수긍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싀갓'의 '싀'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면 '싀아비', '싀어미' 등의 '싀'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친정쪽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된다. 친정 부모와 비교하였을 때, '시아버지나'나 '시어머니'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기에 '싀아비', '싀어미'의 '싀'를 '새'[新]'로 보거나 이것이 변한 '시'를 '外'의 의미나 한자 '媤'로 보는 시각은 마땅히 교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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