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 방직 여성 노동자_자기 삶의 주인으로 당당히 세상에 외치다

위 사진 속 동일 방직 노동조합 집행부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그 까닭은 아마도 한국 최초의 노조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였다는 자부심과 희망, 여성 노동자의 설움을 여성 지부장이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의 산업은 섬유 가발 전자 등 여성 노동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들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남녀 임금 격차는 국제 노동 기구(ILO) 통계가 있는 나라 중 꼴찌였다. 동일 방직은 섬유 산업을 대표하는 회사로 80%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지부장이 항상 남성이었고, 정부의 저 임금 정책을 옹호하는 어용 노조였다.
동일 방직은 노동조합이 있어서 복지 시설이 괜찮은 회사로 알려져 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지켜졌고, 기숙사와 장미꽃이 핀 야외 휴게 시설 등은 당시 노동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임금은 턱없이 낮았고, 노동 강도는 높았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야라고 울음을 터뜨리는 날도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있어서 설움을 견딜 수 있었다.
농촌에서 온 동일 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거의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클럽 활동이라는 기숙사 내 소그룹 활동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노동법 강좌를 들으며 노동자로서의 본분을 자각하였다. 작업 중 반장들이 노동자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개선하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면, 이를 지지하는 쪽지글이 붙는 등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임금 문제를 비롯한 노동조합의 요구 사항을 기숙사의 대자보를 통해 수렴하기도 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라는 생활 공간에서 의사를 표현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 의사소통을 몸으로 익혔다.
여성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노동조합의 남성 간부들은 노동자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지부장을 여성으로 뽑았다. 여성 지부장과 노조 간부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시작하자 회사는 노조를 와해하려고 하였다. 여성 지부장이 갑자기 경찰에 체포되고, 대의원을 선출하는 장소에 회사 측 사람들이 똥물을 끼얹기도 하였다. 노조원들은 동료가 끌려가는 것을 막겠다고 윗옷을 찢는 시위를 하고 똥물을 뒤집어 쓰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동일 방직이라고 하면 나체 시위나 똥물, 블랙리스트를 떠올린다. 그러나 동일 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억압과 탄압받는 존재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일면만 이해하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다운 삶을 살겠다고 민주 노조 운동을 시작한 여성 노동자들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
동일방직 노동자투쟁東一紡織 勞動者鬪爭

내용 요약
동일방직(東一紡織) 노동자투쟁(勞動者鬪爭)은 1972~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이다. 남성 중심의 어용 노동조합에 대항하여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5월 10일 처음으로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고 민주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회사 측과 남성 노동자들의 방해와 폭력,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부당한 개입에 저항하였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를 무산시키려는 똥물투척사건이 일어나자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농성으로 대항하였지만, 회사 측에 의해 집단해고가 되었고 이후 복직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
1972~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
발단
동일방직은 1955년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설립된 방직공장에서 연원하여 1966년 1월 동일방직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1970년대 대표적인 섬유류 제조업체가 되었다. 동일방직의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1946년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1972년까지 역대 위원장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여성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어용 노동조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경과 및 결과
1972년 5월 10일 노동조합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주길자가 선출되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처음으로 여성 지부장이 되었다. 여성 위원장이 주도하는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시작이었다. 1975년에는 여성 노동자인 이영숙이 다시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회사 측과 남성 노동자들은 불신임안을 제출해 노동조합 집행부를 교체하려 하였다. 1976년 7월 23일 남성 노동자들의 고발로 이영숙 지부장이 연행되고 남성 노동자들은 대의원대회를 열어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반발하며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철야 농성에 들어가고 지부장 석방을 요구하였다. 회사 측이 수도와 전기를 모두 끊어 버렸지만 800여 명이 농성에 참여하였다.
7월 25일 오후 5시 경찰은 강제 진압을 개시하였고 그에 맞서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반나체 시위를 하며 저항하였지만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72명이 연행되고 50여 명이 기절하였으며 14명이 병원에 실려 갔다. 7월 26일 여성 노동자 300여 명은 출근하지 않고 섬유노동조합 본조에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여 밤 11시경 지부장 등이 석방되었다.
1977년 1월 21일 노동조합원들은 ‘동일방직사건수습투쟁위원회’를 구성해 각계에 사건 진상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여 노동청의 중재로 자율적인 대의원대회 개최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노동자들의 방해와 난동이 있었지만, 1977년 4월 4일 여성 노동자 이총각이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8년 2월 21일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회사 측과 섬유노동조합 본조가 합세하여 민주노동조합를 파괴하려고 “도시산업선교회와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라는 빨갱이 불온 단체가 배후에 있다.”라고 선전하였다.
2월 21일 새벽 이른바 ‘똥물투척사건’이 일어났다. 남성 노동자들이 조합원 투표를 준비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뿌리며 방해하였다. 3월 6일 섬유노동조합 본조는 동일방직 노동조합를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이총각 등 4명을 반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제명하였다.
3월 10일 76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근로자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식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부분 바로 연행되었지만 나머지는 명동성당주1으로 가서 14일 동안 단식 농성을 전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중재로 회사에 복귀하였지만, 회사 측은 노동조합 탈퇴 각서를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무단결근을 이유로 4월 1일 124명을 해고하고 2명을 자진 퇴사시켰다.
섬유노동조합위원장 김영태는 해고 노동자 126명의 명단을 블랙리스트주2로 배포하여 취업을 못 하게 하였다. 4월 26일 해고 노동자 65명은 대의원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회사에 들어가 농성하였지만, 전원 연행되고, 4월 28일 박복례 지부장이 선출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되었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 투쟁을 전개하였다.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일방직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였다는 것을 밝혀 내고, 신청자 74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으며 34명의 복직을 권고하였지만 회사 측은 거부하였다. 2018년 12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위원장 최연봉)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총 4억5천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일방직 노동자투쟁은 1970년대 섬유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민주노동조합운동이었으며, 1980년대 인천 지역의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동일방직 사건

개요
1978년 2월 21일에 경기도 인천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현 DI동일) 인천공장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에 대한 탄압 사건.
배경
동일방직은 1955년 정헌 서정익(1910~1973) 창업주가 귀속재산 동양방적공사를 불하받아 세운 방직회사로, 주 생산품은 재봉실, 면직물이었다. 고용 노동자는 약 1,300여 명이었으며 이 중 절대 다수인 1,200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다. 노조는 있었으며 동양방적공사 시절 1946년 결성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핵심 조직이었으나, 1948년 전평 해체 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회사 측의 지시를 받는 어용 노조였고 그나마도 남자 기술직이 노조 간부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1966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파견돼 위장취업한 조화순 목사와 6개월간의 소그룹 활동을 통해 권리의식을 자각해 여성 집행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72년 한국 최초로 주길자 씨를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하여 집행부를 새로 구성했다.
이에 사측은 폭언, 협박, 부당해고, 사표 강요, 부서이동 등의 불이익을 주며 탄압을 가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5년에는 이영숙 노동자를 절대 다수의 지지로 선출했다. 그러나 사측은 1976년 2월 대의원 선거에서 탄압을 했고, 4월 정기 대의원대회도 사측의 회유 공작으로 무산됐다. 이에 노조측은 동월 23일 대의원대회를 열었으나 비슷한 이유로 무기 휴회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측 지지자 고두영 등 남성 조합원들이 대의원을 매수하고 지부장을 폭행하자 노조 측은 섬유노조 본조에 징계를 요구했고, 이에 본조는 이들을 징계처분시켰다. 그러자 고두영은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에 공탁금 30만 원을 걸고 '징계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7월 13일에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고, 16일에 조병규 경기도지사는 소집권자를 고두영으로 확정했다. 그는 7월 23일을 대의원대회 날짜로 잡자 7월 22일에는 본조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보고대회를 열고자 했다. 이에 사측은 보고대회장인 식당 불을 끄고 문을 걸어잠궜으며, 지부장을 조합원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조합원들이 보고대회를 요구하며 몰려들자 사측은 경비와 사원들을 동원해 폭력으로 제지시켰고, 기숙사 문도 못질했다. 더 나아가 경찰이 지부장을 연행했다. 이 상태로 어용 조합원들끼리 모여서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해 어용노조로 회귀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 문을 부수고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등 사측의 제지를 뚫고 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지부장 석방과 어용노조 대회 무효 등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지부장을 풀어주면서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다시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를 연행했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24일 밤 10시까지 지부장과 총무를 풀어주지 않으면 파업에 돌입한다고 결의했지만 경찰은 이들을 풀어주지 않았고, 사측은 단전/단수를 벌이고 화장실 문까지 봉쇄했으며 가족들이 음료수를 들여보내도 경비원들은 병째로 깨부쉈다.
25일 아침 들어서 회사 주변 교통은 두절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합원들은 더위로 인해 탈진 상태에 접어들었다. 저녁 6시 반에 기동경찰이 호송버스를 배치하고 몽둥이를 든 채 기숙사를 포위했다. 경찰측이 5분간 말미를 두고 자진 해산하라고 강요했으나,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고 노총가를 부르며 나체시위를 강행했지만, 경찰은 반나체 상태의 여성 노동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했다. 당시 70여 명이 연행당하고 50명이 졸도했으며, 70명이 부상당해 이 중 14명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심지어 한 여성 노동자는 이 사태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7월 29일 섬유노조 대의원대회에선 김영태가 방순조 위원장이 동일방직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물으면서 위원장이 되었고, 김영태는 지부측의 기대를 무시하고 관과의 관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때에도 고두영 집행부와 사측의 탄압이 지속되어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본조에 몰려가 호소를 했다. 이에 따라 11월 3일 본조에서 이풍우 기획실장이 수습대책위원장으로 내려와 노조로부터 권한을 양수했지만, 이들은 노동자들의 뜻과는 달리 회사와 공모해 반장 이상의 사원을 노조에 가입시키도록 단체협약을 갱신시키자 경기도는 12월 25일 단체협약 승인을 받아들였다. 이 공문을 받아든 여성 조합원들은 즉각 반발해 본조의 비리를 사회에 고발토록 결심해 "섬유노조는 근로자의 아픔을 대변하라"고 호소문을 써서 각계에 배부했고, '동일방직사건 수습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재야단체로 하여금 '사건 해부식'을 1977년 2월 6일에 열기로 했다.
그해 2월 4일 밤에 노동청으로부터 협의 주선 및 모든 요구조건 수락 등을 받아내 해부식을 취소하는 한편, 사원의 노조 가입 문제를 배제하고 조합이 자율적으로 대의원대회를 열도록 하는 등 6개 항에 합의했다. 이후 노조 탄압에 앞장섰던 생산부장과 노무주임은 인사조치되고 조합은 경위보고대회를 열었다. 이후 본조에서 이광환 조사통계국장이 수습대책위원회로 새로 내려와 남녀 공평하게 수습위원 13명을 선출했고, 2월 28일부로 대의원대회를 열기로 합의했으나 새벽 5시 40분경 남성 조합원 175명이 지부 사무실을 점거하고 투표함과 투표소를 파괴했다. 이에 조합원들이 농성할 기미를 보이자 서민석 부사장이 남자들을 설득하면서 해산했다. 이후 남성 조합원들은 집행부 의석을 많이 내놓으라며 시비를 걸었으나 여성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로 공작이 무력화되고, 4월 4일 대의원대회에서 이총각 노동자를 선출한 후, 21일에는 유니온샵 등을 담은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6월 15일에 조직분규로 쫓겨난 674명을 복귀시켰다.
정부는 언론을 통해 '여성 노조원=빨갱이'라고 분위기를 몰아갔고,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은 이미 1978년 1월 22일 본조 대의원대회에서 규약을 개정해 사고지부에는 한국노총이 보낸 수습위원들이 집행부를 맡고, 외부 세력 침투를 봉쇄코자 '근로환경 개선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산하에 조직행동대를 편성토록 했다.
사건 전개
동일방직 노조는 1978년 정기총회를 2월 중에 개최한다고 본조에 통고했고, 선거일을 2월 21일로 공고했다. 이에 사측은 남성 조합원들을 매수해서 대회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에 불구하고 2월 21일 대의원선거를 강행하자, 박성기 등 남성 노동자 대여섯명이 방화수통에 똥물을 담아와서 여성 노동자들의 입과 옷, 신체 등에 퍼부어 폭언과 폭행을 했고, 투표함 40여 개를 파괴했다. 이때 현장에 있던 경찰들은 울부짖으며 도와달라는 노동자들을 방관하며 오히려 욕설을 퍼부었다. 대회 무산으로 노동자들이 농성을 시작하자 500여 명이 모였다.
섬유노조 측은 이를 꼬투리삼아 2월 23일 제60차 집행위원회에서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해 이총각 집행부를 해산시켰고, 3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조합원 자격을 뺏고 제명시켰다. 이에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정부-회사-섬노 3자 커넥션에 의한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자 투쟁을 전개했다.
3월 10일 노동자 80여 명이 TV 생중계 중인 노동절 기념식에 숨어들어가 정동호 한국노총 위원장의 연설 때 일어서 ‘아무리 가난하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똥은 먹고 살 수 없다’라고 말하며 플래카드를 펼치고 전단을 살포하여 격렬히 항의하지만, 이들은 강제 퇴장당하고 31명이 연행됐다. 이후 노동자들과 신/구교 종교인들이 동일방직노조 문제 해결 및 산업선교회 탄압 중지 등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전개했고, 3월 20일에는 원풍모방 등 노동자 30여 명과 함께 CBS 기독교방송에 들어가 "광장에 크낙새가 죽은 건 크게 보도하면서 우리가 당한 건 왜 알리지 않느냐"며 노동문제 보도 외면에 항의하며 생방송을 중단시키고 방송국장 면담을 요구했다. 3월 21일에는 각계 재야인사들이 '동일방직사건 긴급대책협의회'를 구성해 정부 고위층과 협상을 벌여 2월 21일 이전 상태로 원상복구시키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고무된 노동자 111명은 3월 23일 단식농성을 풀었으나, 3월 26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때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2명이 남영나이론, 원풍모방 등 노동자 4명과 함께 단상에 올라가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순 없다!",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구속됐다. 이에 사측은 전 노동자들에게 회사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각서를 내게 했고, 4월 1일에는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노동자 124명을 해고했다. 뒤이어 섬유노조는 해고자 명단을 전국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막게 했다.
뒤이어 사측은 4월 26일 대의원선거를 실시해 어용 지부장을 선출하려 했고, 이에 이총각 지부장과 김인숙 총무부장 등 해고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하려다 폭행죄로 구속되었다. 이윽고 다음날 사측이 신임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대의원선거를 강행해 박복례를 지부장으로 선출하자, 해고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추송례를 지부장 직무대리로 뽑았다. 같은 시기 김영태 섬노위원장이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입후보하자 해고 노동자들은 5월 15일 밤차로 부산까지 내려가 김영태의 만행을 폭로하는 유인물 400부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7명이 구속됐다.
위와 같은 사태 해결과 산선에 대한 비방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원과 연대운동이 지속됐고, 해고 노동자들은 임시노조를 구성해 기도회나 집회마다 적극 참여해 동일방직 문제에 대한 진상을 폭로했다. 6월 4일에는 김명자와 김영숙이 성남 주민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다 연행됐고, 9월 18일에는 4.26 회사 기습사건 당시 구속 노동자 공판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사측 증인들 및 경찰과 충돌해 14명이 연행됐다. 심지어 9월 22일 서울 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도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다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들을 무차별 폭행해 해산시키자, 이들 중 35~40명이 실신하고 약 40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다.
뒤이어 11월 6일 부산에서 동일방직 사태에 대해 강연했던 조화순 목사가 다음날 연행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고, 12월 30일 중앙노동위원회가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기각하자 회사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서울고등법원에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에 관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뒤이어 1979년 2월 25일 '똥물사건 1주년 기념식'을 열려다 경찰에 의해 무산됐고, 김영태 노총위원장은 8월 14일 MBC 보도특집에서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난했다. 그의 발언을 전후해 기업가들 사이에선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도산(倒産)한다"라는 풍문이 퍼지기도 했다.
다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반전의 계기가 보이는 듯 했으나, 1980년 5.17 내란으로 농성이 중단되고 9월 30일 서울고법 제3특별부가 해고예고예외인정 재심신청기각결정 취소의 소를 기각해 사건이 종결됐다.
사건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 때문에 온갖 직장에서 받아주질 않았고, 동일방직 출신임을 숨겨도 무자비하게 해고됐다. 게다가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탓에 일일이 감시를 받았으며 시집을 가도 시댁으로부터 학대를 받는 등 온갖 박대가 이어졌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노동단체, 생활협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지에 몸담으며 각자의 길을 걷다가 2000년 국민의 정부가 민주화운동 보상신청을 받으면서 재집결했으며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같은 해 최종길 교수의 막내동생 최종선이 중앙정보부 재직 시절 동일방직 노조탄압이 중앙정보부와 연계돼 있다고 진술했다. 뒤이어 해고 노동자들은 124명 전원 복직투쟁을 전개했지만 사측은 그때의 해고가 정당했다 하여 복직시켜주지 않고 있다.
2010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청계피복노조 등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 결정문>을 발표하면서 동일방직 등의 블랙리스트 문제가 공식적으로 확인됐으나, 2014년에 대법원은 국가폭력에 대한 정신적 위자료 청구에 대해 '국가와 화해가 성립됐다'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다만 2017년 문재인 정부 수립 후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국가청구 금지가 위헌으로 판정되어 2018년 12월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노동자들의 사진을 찍어 준 이기복은 이후에도 사진관을 운영하다 2000년에 은퇴했으며, 해고 노동자들과 다시 만나기도 했다.
2025년 5월 1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으며, 사진사 이기복과 이총각 지부장을 포함한 당시 여공들 일부가 인터뷰에 응하여 출연했다.
동일 방직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호소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호소 1 (1978년 2월)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울부짖음은 지난 2월 21일 인천 동일방직(인천시 동구 만석동)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조종을 받은 깡패 같은 근로자들에게 당한 저희들이 똥물을 뱉으며 하던 말입니다. 고무장갑을 낀 남자들은 똥을 바께스로 들고 와 머리서부터 뒤집어씌우고 손으로 찍어 투표하러 들어오는 저희들의 입속에 쑤셔 넣고 걸레에 묻혀 얼굴에 문대어 똥으로 뒤범벅이 된 눈은 뜰 수가 없었으며 귓구멍에 틀어박힌 똥 때문에 말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무지막지한 깡패들은 저희들의 머리채를 나꿔채 뒤로 젖히고 이빨로 입술을 물어뜯는 등 이리와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이 기막힌 만행은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과 섬유노조 본조, 그리고 회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자행된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중략) 1976년 2월 대의원 선거 때부터는 회사와 그 조종을 받은 노동조합 말살계획은 표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와 감시 온갖 모략에도 굴하지 않고 인내와 용기,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이 조합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30도가 넘는 땅볕 아래 물도 마시지 못하며 밤낮없이 단식농성을 만 3일이나 했고 경찰과 사원들의 몽둥이 세례에, 세계의 어떤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벌거벗은 몸으로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중략) 72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50여 명이 기절을 하고 14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한 근로자는 쇼크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6개월을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는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저희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구둣발에 짓밟혔고 경찰과 바퀴 밑에 드러누웠으며, 몽둥이에 쓰러졌습니다. (중략) 그리고 회사측은 본부 노동조합의 신임을 받고 있는 반도상사(부평 소재) 전 지부장이었던 한순임이라는 사람에게 인천시내에 있는 문화여관 105호실을 무기한 전세 내어 (중략) 근로자들을 강제로 동원 한순임의 말(교육)을 듣게 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되는 질문을 하면 대기하고 있는 깡패들에게 연락하여 머리채를 휘어잡고 강제로 입을 맞추며, 입술을 물어 뜯어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치안유지를 위해 동원된 정복경찰들은 도와달라고 외치는 저희들에게 “야 이 쌍년들아 입 닥쳐! 이따가 말릴 꺼야”하며 욕설만 퍼붓고 구경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래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입니까? 이렇게 매를 맞고 똥을 뒤집어썼어도 우리는 투표하려고 노조사무실을 들어가려 했으나 깡패 남자들이 점령하여 난투극이 벌어져 우리는 70명이 부상을 당하고 내던지는 유리에 손이 찢겨 7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중략) 무조건 복종이라는 말에 현 노조⋅조합측에 거부를 하였더니 (중략) 사고지부라는 공고를 회사의 게시판에 붙이고 말았습니다. (중략)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100억 불 수출의 도구로 사용된 저희 노동자들은 1,000불 소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똥을 먹어야 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근로자들이 당하고 있는 설움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쓰러지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싸워 승리할 것입니다.
전국 섬유노동조합 인천 동일방직지부 조합원 일동
이 사료는 ‘동일방직 똥물세례사건’ 이후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1978년 2월에 발표된 동일 방직 노동자들의 호소문이다. 호소문을 통해 동일 방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당한 똥물세례사건과 1978년 2월에 이르기까지 동일방직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밝히고 있다. 1972년 인천의 동일 방직에서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지부장으로 주길자(朱吉子)를 선출하여 여성 노조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그러자 회사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회사는 노동조합원들을 표적으로 삼아 욕설하고 협박하였으며 출근 정지, 부서 이동, 사표 강요, 부당 해고를 일삼았다.
1975년 동일 방직 노조가 새 지부장으로 이영숙(李英淑)을 선출하자 회사는 노조 집행부를 남성 중심의 어용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회사 측 어용 남성 노동자들은 이영숙 지부장에게 폭행을 가했고, 이에 저항한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은 기숙사에 감금당했다. 그러자 여성 노동자들은 창문을 부수고 나와 노조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1975년 7월 25일 경찰은 이들을 포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옷을 벗고 항의했지만 경찰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이 사건으로 72명이 연행되고 40명이 기절했으며 14명이 병원에 입원하였다.
1978년 2월 21일 동일 방직 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해 투표를 시작하자 회사 측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조합원들의 입과 가슴, 옷 등에 똥을 발랐다. 당시의 참혹한 현장은 위의 호소문에 잘 나타나있다. 이 사건이 소위 ‘동일방직 똥물세례사건’이다. 이날 대의원 선거에서 40여 개의 투표함이 박살났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국섬유노동조합은 동일 방직 노조 집행부 전원을 제명처분 하였다.
동일 방직 노동자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투쟁했다. 3월 10일 근로자의 날 행사장인 장충체육관에서 동일 방직 노동자 80여 명은 동일방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과 종교인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되었고 3월 20일 기독교방송국에 진입하여 노동문제에 침묵하는 언론에 항의했다. 또한 노동자들은 마당극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를 제작했고, 1978년 김민기가 제작한 노래 테이프 「공장의 불빛」은 노동자들의 힘든 삶과 노동조합에 대한 회사의 탄압과 해고 등을 내용으로 담았다.
동일 방직 회사 측은 1978년 4월 1일 노동자 126명을 해고하였다. 해고 조치에 맞춰 섬유노조위원장 김영태는 전국 사업장에 공문을 보냈다. 해고 노동자 126명의 명단, 주민등록번호, 본적 등을 기재해 통보하고 이들을 일절 받아주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후 김영태는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입후보했고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15명은 부산으로 내려가 김영태의 죄상을 폭로했지만 이 문제로 7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유신 체제의 붕괴 후에도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복직을 위해 김영태를 고소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긴 투쟁 귀한 삶’ 동일방직 50년의 투쟁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50년 투쟁의 기록 ‘긴 투쟁 귀한 삶’ 출판기념회가 지난 주말 열렸다. 추천글을 청탁받아 썼다가 퇴짜맞았다. 고쳐 써서 보냈지만 “하종강씨 글 참 잘 썼는데, 이렇게 쓰면 안 돼. 왜냐하면…”으로 시작되는 긴 전화를 받고 다시 썼다. 세번째로 쓴 글을 보내면서 “이대로 싣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서 그나마 실리게 됐다.
사실 이 노동자들은 그렇게 50년 세월을 싸워왔다. “이러저러한 투쟁을 했다”고 간단히 기록된 사건도 대부분 그 투쟁을 결정하는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 “싸울 때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당연히 나온다. 싸움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의견이 오간다. 그렇게 부대끼며 50년 세월을 싸워왔던 거다.
“20대 때부터 70대가 되기까지 50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대에 노동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다. 1978년 해고된 124명 중 상당수가 나중에 이름이 바뀌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취업하느라 친척 언니나 동네 언니 이름으로 취업했다가 해고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이름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나체 시위’ ‘똥물 테러’ ‘부활절 투쟁’ ‘블랙리스트 철폐 투쟁’ 등에서 보여준 투사의 면모뿐만 아니라, 해고된 동료들이 결혼을 하거나, 가게를 열거나, 이사를 가거나, 김장을 하는 등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모여서 동지애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45년 전, 노동운동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만난 사람들이 바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비슷한 또래가 많아서 서로 친구처럼 지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친구처럼 지냈다”는 것은 우리 노동운동사 속에서 얼마나 큰 ‘벼슬’인가?
당시 그 노동자들에게 귀에 못 박히게 들은 말이 “너는 배운 놈이니까…” “너는 대학생이니까…” “너는 지식인이니까…” “너는 ‘먹물’이니까…” 등이었다. 대화나 토론을 하다가 그런 지적을 당하고 나면 그 뒤에는 더 이상 진전이 안 되곤 했다. 등 뒤에서 항상 느껴지던 그 따가운 시선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지금 민주노총 등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 역시 전태일 열사와 동일방직 등 1970년대 노동자들의 투쟁이 내린 뿌리가 거둔 성과다. 감히 말하거니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지금 민주노총은 없었거나 훨씬 더 늦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6공단 입구 ‘닭장집’에 살던 동일방직 노동자가 있었는데, 날이면 날마다 그 방에 모였다. 한번은 친하게 지내던 청년이 “할 말이 있으니, 옥상에서 보자”고 했다. 이슬비가 내려 바닥이 젖어 엉거주춤 쪼그려 앉은 채 대화를 나눴다. 요약하면 “20대의 혈기왕성한 남녀가 이곳에서 자주 어울리다가 감정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중대한 오점을 남기게 될 테니,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운동적 차원에서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야 한다”는 충고였다. 당연히 동의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중에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와 결혼을 했다.
출판기념회에서도 그 친구가 아내를 도와 여러가지 ‘잔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을 때, 40여년 전 그 ‘비 오는 날 옥상의 대화’를 회상하며 물었다. “혹시 그때부터 당신은 일찌감치 흑심을 품고, 나하고 더 친해질까 봐 미리 연막을 쳤던 것 아니오?”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세월이 지나니 아픈 시기도 그렇게 추억이 됐다. 4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에 내 이름은 “하종강이 강의를 했다”고 딱 한줄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노동자들의 삶에 그렇게 남긴 흔적보다 더 귀하고 자랑스러운 ‘훈장’도 없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마지막까지 남은 몇명은 차마 헤어지지 못한 채 카페에 모여 앉아 긴 대화를 나눴다. 고공농성 중인 세종호텔, 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 얘기와 함께, 최근 드라마 ‘노무사 노무진’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이 자신이 대표로 활동했던 시민단체 ‘동물행동권 카라’에 노조가 만들어졌을 때 극히 부정적 언행을 한 일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 나오는 명대사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가 생각났다.
칼럼을 마무리하는데, 노동부 장관에 지명된 민주노총 전 위원장 김영훈 기관사가 열차를 운행하는 모습이 뉴스에 나온다. 세종호텔, 옵티칼하이테크, 동물권행동 카라 노동자들마저 ‘투쟁 ○○년사’를 써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 그가 해결해야 할 첫번째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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